-청마시비와 문학의 길...
어쨌든. 당시 남여상은 그리 오래된 학교는 아니었으나(1955년 개교) 전체적으로 나무와 화초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은 분수가 가동되던 연못엔 철 따라 연꽃이 피기도 했고, 비닐하우스 온실이 제법 규모 있게 꾸려져 있어서 그 안에 갖가지 화초들이 그득했던 기억도 뚜렷하다. 특히 나무들이 우거진 화단쪽에는 무화과가 탐스러웠는데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했던 당시 아이들에게 무화과는 좋은 군것질거리였다. 어둠 속을 더듬어 찐득한 무화과 열매들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다가 갑작스런 플래쉬 불빛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으로 치면 경비아저씨였는데, 그때는 일본말로 소사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40~50의 중년이었을 그 사내는 우리들을 복도에 나란히 세워놓고 커다란 손으로 우리들 뺨을 한 대씩 갈겼다. 그때 사촌형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였으니 무화과 하나에 받은 처벌치곤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 사내의 훈육이 도둑질에 대한 계도 목적이었다 해도 꼭 그 방법밖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어른이 된 후에도 한 적이 있다. 유년기에 각인된 몇 안 되는 밤의 기억들 가운데 하나이다.
남여상은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네 명의 누이들 가운데 큰누이는 꽤나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남여상은 당시 부산에선 명문고로 꼽히던 학교였고 누이는 그 학교에서도 전교권에 들 정도의 인재였다. 앞서 말한 양장점집 그 아이의 아빠도 이 학교 윤리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누이는 가끔 그 아이의 아빠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있었다. 그때 내가 큰누이를 유난히 따르고 좋아했던 것은 어쩌면 그 아이의 아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남여상은 내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교문에 들어서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화단 한 켠에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청마시비’였다. 그때 나는 청마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시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이였다. 그런데도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는 그 몇 줄의 비문에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같다. 그때 썼던 일기장에 이 구절이 그대로 적혀 있는가 하면, 문학을 전공하는 내내 유치환을 즐겨 읽지 않았으면서도 이 시구절만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살았다.
훗날 나의 지도교수가 청마의 친일 작품들을 발굴해 학계에 발표하고, 그로 인해 지역 사회가 커다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논문 발표 자리에서 청마를 기리는 단체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그에 맞서 청마의 친일 행적을 조목조목 자료로 드러내 보이는 지도 교수를 보면서, 나는 남여상 화단 한 켠에 우뚝했던 청마의 시비를 떠올렸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그의 친일 작품들 앞에서 그의 ‘바위’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정말 ‘바위’같은 삶을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일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오래도록 내게 던진 화두와도 같은 물음이기도 했다.
청마는 내가 문학을 하는 내내 곳곳에서 마주쳐 왔다. 그의 이름 끝에 따라붙은 이영도와의 로맨스는 ‘청마’라는 큰 이름으로 턱없이 미화된 스캔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통영과 거제가 벌인 청마의 출생지 논쟁은 한 시인의 문학적 기념비보다는 관광상품콘텐츠로서 접근하는 지역의 문화 인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내 유년의 한 쪽에 각인된 청마는, 그렇게 내 삶의 곳곳에서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여상의 그 시비를 떠올렸다. 시비가 뭔지로 몰랐던 그 어린 나이에 그 두어 줄 시구는 왜 그리 선명하게 각인되었을까. 문학을 떨구고 싶었던 때가 있었으나 그게 천형(天刑)처럼 들러붙어 평생을 따라가거나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몹쓸 동행은 어쩌면 남여상의 그 청마시비에서부터였는지도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남여상의 이름이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언젠가 통영 청마문학관에서 문학기행을 온 부산영상예술고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팻말을 보면서 와락, 반가움이 일었다. 먼 길을 온 그들에게 청마의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오지랖이라 여겨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여전히 그들 교정에 우뚝할 그 시비 앞에서 그들이 자랑스러워 할 이름일지도 모를 ‘청마’였다. 그런 그들에게 청마의 속 얘기들은 어쩌면 모르는 게 좋을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