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청춘들의 도시
아버지 평생을 통틀어 일곱 가족이 함께 모여 산 세월은 부산에서의 10여 년이 전부였다. 그래서 가족들 저마다 그 10여 년의 세월은 각자의 인생에 의미 있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화목했고, 그 속에서 다섯 오누이들의 꿈이 소박하게 여물어 갔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들이 가난한 환경의 나머지 딸들에게 결코 소박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누나로부터 학습되었다.
큰 누나는 대학 진학이 목표였고 성적도 꽤 괜찮았던지라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입학금만 마련해주면 나머지 학비는 알아서 하겠다고, 밤새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던 누나는, 여러 날 아버지의 고함과 단호함 앞에서 끝내 자신의 꿈을 접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비탈길을 걸어 내려 다른 도시로 떠났다. 밤새 울었던 탓인지 그 새벽 누나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로터리까지 배웅하는 내 머리칼을 쓰윽쓰윽 쓰다듬으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겼던 것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밤 아버지는 누나에게 “없는 살림에 공부는 아들 하나면 된다”라는 모진 말로 누나의 꿈을 꺾었다고 한다. 그렇게 꿈이 꺾인 누나가 향한 곳은 ‘수출자유지역’의 도시 ‘마산’이었다. 그 새벽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은 도시의 이름, 그것이 ‘마산’이었다. ‘새벽’, ‘퉁퉁 부은 눈’...그 희뿌윰한 새벽빛마냥 흐릿하게 남은 몇 개의 파편적인 기억들...내가 기억하는 마산의 첫 이미지들이다.
그 시절 대개 그러했듯이 살가운 가정 환경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을 아버지. 그런 성장 과정에서 은연 중에 길러졌을 다혈질에, 교도관이라는 직업으로 더해진 성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이어서, 이후로 나 또한 상처를 입을 때가 여러 번이었다. 하물며 ‘하나뿐인 아들’을 내세워 딸의 꿈을 무참하고도 모질게 짓밟은 아버지를 나는 오래도록 원망했었고,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까지는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나야 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는 오래도록 네 명의 누이에게 본의 아닌 부채감을 가져야 했다. 아버지의 계획(?)대로 5남매 가운데 대학 진학을 한 것은 내가 유일했고, 그때쯤 우리집은 경제적 여유가 생긴 탓에 나의 대학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그때껏 누이들은 저마다의 가정을 꾸려 먹고 사는 일에 또 다시 치열해야 했고, 그런 생계의 현장에서 멀리 있던 나의 20대는 여행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철없는 청춘일 따름이었다. 나중에 나도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내가 누이들에게 지고 산 빚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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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이어 가는 걸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