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민기 minki Sep 06. 2024

'마산', 그 슬픈 이름의 도시...

-날개 꺾인 청춘들의 도시

   아버지 평생을 통틀어 일곱 가족이 함께 모여 산 세월은 부산에서의 10여 년이 전부였다. 그래서 가족들 저마다 그 10여 년의 세월은 각자의 인생에 의미 있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화목했고, 그 속에서 다섯 오누이들의 꿈이 소박하게 여물어 갔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들이 가난한 환경의 나머지 딸들에게 결코 소박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누나로부터 학습되었다.

   큰 누나는 대학 진학이 목표였고 성적도 꽤 괜찮았던지라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입학금만 마련해주면 나머지 학비는 알아서 하겠다고, 밤새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던 누나는, 여러 날 아버지의 고함과 단호함 앞에서 끝내 자신의 꿈을 접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비탈길을 걸어 내려 다른 도시로 떠났다. 밤새 울었던 탓인지 그 새벽 누나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로터리까지 배웅하는 내 머리칼을 쓰윽쓰윽 쓰다듬으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겼던 것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밤 아버지는 누나에게 “없는 살림에 공부는 아들 하나면 된다”라는 모진 말로 누나의 꿈을 꺾었다고 한다. 그렇게 꿈이 꺾인 누나가 향한 곳은 ‘수출자유지역’의 도시 ‘마산’이었다. 그 새벽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은 도시의 이름, 그것이 ‘마산’이었다. ‘새벽’, ‘퉁퉁 부은 눈’...그 희뿌윰한 새벽빛마냥 흐릿하게 남은 몇 개의 파편적인 기억들...내가 기억하는 마산의 첫 이미지들이다.

부림시장...국제시장에 익숙했던 터라 딩ㅅ; 부림시장은 국제시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어서 좋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학문당은 연령을 불구하고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학문당 맞은 편에 있는 <시민극장>. 당시 청춘들의 핫플레이스였던 듯. 지금은 극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 시절 대개 그러했듯이 살가운 가정 환경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을 아버지. 그런 성장 과정에서 은연 중에 길러졌을 다혈질에, 교도관이라는 직업으로 더해진 성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이어서, 이후로 나 또한 상처를 입을 때가 여러 번이었다. 하물며 ‘하나뿐인 아들’을 내세워 딸의 꿈을 무참하고도 모질게 짓밟은 아버지를 나는 오래도록 원망했었고,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까지는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나야 했다.

내가 처음 경양식을 먹은 곳이 이 근처 <슈바빙>이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슈바빙과 더불어 이 골목(창동) 안에 가장 핫플레이스였던 <해거름>은 여전히 성업 중
<해거름>은 과거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계약 조건으로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빼곡한 LP판을 듣는 낭만이 있다. 대개는 중장년층이지만 간혹 청춘 남녀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는 오래도록 네 명의 누이에게 본의 아닌 부채감을 가져야 했다. 아버지의 계획(?)대로 5남매 가운데 대학 진학을 한 것은 내가 유일했고, 그때쯤 우리집은 경제적 여유가 생긴 탓에 나의 대학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그때껏 누이들은 저마다의 가정을 꾸려 먹고 사는 일에 또 다시 치열해야 했고, 그런 생계의 현장에서 멀리 있던 나의 20대는 여행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철없는 청춘일 따름이었다. 나중에 나도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내가 누이들에게 지고 산 빚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

다음 주에 이어 가는 걸로...(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