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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기 minki Sep 20. 2024

'마산', 그 슬픈 이름의 도시(2)

-우묵한 밤의 풍경...'회원2동'


큰 누나와 둘째 누나가 마산수출자유 지역으로 취업을 해 떠나, 이제 남은 식구는 다섯이었다.

그럼에도 집안 형편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말단의 교정직 공무원 월급으로는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시절이었을 것이다.

 간혹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앞세워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께 경제적 원조를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고성만 오갔던 기억뿐이다. 

그 고성의 내막까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논밭이라도 팔라는 의견과 농사꾼이 논밭 없이 어찌 사느냐,는 정도의 시대극 대사같은 논쟁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저마다의 생계가 절박했던 탓이었을까. 지금의 나로서도 감히 가늠해 볼 수 없는 당신들의 삶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작스레 이삿짐을 싸셨다. 

할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전보가 날아 들었다.

그해 여름, ‘이랴~ 이랴~’를 외치시며 뙤약볕 아래서도 기운차게 소를 부리시던 할아버지셨다.

어린 내 기억 속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눈부심 그 자체였었다. 

하얀 머리칼에 하얀 수염, 그리고 하얀 모시 삼베 옷차림이 튕겨내던 햇살의 기억. 

누런 소가 이끌던 쟁기 끝에 그렇게 하얀 빛무더기로 이끌리던 할아버지는 한낮의 햇살처럼 너무 쉽게 사그라들었다.

부산에서 시골로 가기 위해선 창녕 남지에서 버스를 갈아탈 때가 있었다. 당시 남지는 시골집에서 오가던 곳들 중 가장 번잡한 읍이었다. 이 사진은 최근의 남지 들녘 풍경이다.

이제 남은 시골집 살림은 4형제 중 맏이었던 아버지 몫이었다. 

살림이랄 것도 없는, 기울어지고 비틀린 기둥과 기댈 때마다 흙벽이 벽지 너머에서 우수수 떨어져 불안하기만 했던 안채. 늘 소여물을 끊이느라 쉭-, 쉭-, 김을 내뿜던 가마솥만 덩그렇던 사랑채. 그리고 비만 오면 질펄거리던 마당과 그 마당 한 켠에 매달려 커다란 눈망울만 떼구르르, 굴려대던 누렁소 한 마리. 그게 시골 살림의 전부였다.


그때 이미 마흔의 나이를 훌쩍 넘기셨던 아버지는 도시에서의 생활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발병은 어쩌면 아버지의 귀향에 적절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도시 남자였던 아버지와 결혼하면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흔쾌히 결혼을 감행한 엄마의 인생 탈출극도 자연스레 거기에서 막을 내렸다. 

10여 호의 초가와 슬레이트 지붕들이 전부였던 집성촌으로의 귀향은 아버지보다 엄마에게 더 절망적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고향집 뒷산 고갯마루에서 내다 본 풍경...엄마에게 이 고갯길은 막막한 삶으로 내몰리는 절망감의 경계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내 유년의 한 때는 저 강물 따라 출렁거렸다.

부산을 떠나던 날의 기억도 비탈길에 머물러 있다. 

약속한 송별식도 아니었지만 비탈길에 등장한 트럭 구경에 동네 아이들이 골목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고, 나는 자연스레 그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 흔한 작별 인사 한 마디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갑작스런 전개가 당시 내겐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던가 보다.

겨울 방학 중이어서 학교 친구들은 나의 전학을 나중에 알았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나서야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개학이 되었을 때, 나의 빈 자리를 궁금해 한 친구들은 몇이나 되었을까’. ‘양장점 집 그 아이는 나의 행방이 궁금하기나 했을까. 나중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영도 비탈길의 우리 옛집 언저리를 무심한 듯 스쳐지나기도 했을까...’  


셋째 누나와 넷째 누나는 아버지, 엄마를 따라 시골로 전학을 했다. 

그러나 나는 첫째 누나와 둘째 누나가 세들어 사는 마산의 어느 골목집에 짐을 부렸다.

 아들 하나는 도시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쇠말뚝같은 교육관이 내린 결정이었다. 

나를 맡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누나들에게 제공한 혜택이 무엇이었는지는 들은 바가 없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마산행을 감행했던 큰누나의 입장에선 나의 존재는 불공평 그 자체였을 것이다. 


마산에 도착한 날 밤을 기억한다. 

컴컴한 도시, 철길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침목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즈음,  회산다리 근처에 있던 북마산역이 철거되었다고 했다.

나무위키 사진, 북마산역이 철거된 건 1977년의 일이라고 한다.


2019년 풍경. 회산다리에서 석전으로 이어지는 철길이 비틀린 침목으로만 남았다. 이 철길 위에서 내 10대 때의 서사 한 편이 영화처럼 펼쳐진 적이 있다.

누나의 자취방은 회원2동 동중학교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중입구에서 내리면 개울을 따라 동중학교까지 길이 이어졌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하나 건너면 공터 옆에 벽돌로 크게 지은 공장이 있었다. 그 공장 담벼락끝  귀퉁이 즈음에 나직한 집들이 지붕을 잇대고 있었다. 

집집마다 골목으로 조그만 창들을 매달고 있어서 밤이면 누런 알전등들이 골목으로 빛을 내뿜었다. 

지금 기억 속에 그 풍경들은 마치 화랑의 전시실 풍경처럼 왜곡되어 있다. 

당시엔 결코 아름답지 않은, 그저 막막하고 외롭고 쓸쓸한 저녁 풍경이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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