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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기 minki Oct 04. 2024

아홉 살, 사내 아이의 밤들(2)...

‘벨튀’의 종말과 오란씨, 그리고 ’하얀 그림자‘의 밤들...

#-1. 벨튀의 종말...어지럼증


벨튀 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 모를 거라 여겼던 순진한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초인종엔 카메라가 있고, 그것이 인터폰 화면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에는

아홉 살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날은 오전반이었던가...오후반이었던가...

하여튼 햇살이 환한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벨튀의 설렘을 안고 들어선 어느 골목길에서

나는 금세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였다.


“야 맞네”, “그래, 이 자슥이네”...


질책과 함께 거머쥔 내 목덜미는 너무 쉽게 달랑거렸다

억센 아귀힘이 내 목덜미를 흔들 때마다 심장이 덩달아 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밤중에 퇴근한 누나들이 불려 와

그 집 대문 앞에서 바들대며 용서를 구하던 모습이 그 골목길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때 큰 누이는 스물 하나, 작은 누이는 기껏 열아홉이었다.

영도 비탈길에서 누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나는,

그렇게 채 1년도 되지 않아 낯선 도시의 누이들에게 큰 짐짝이 되어 버렸다.



#-2. 오란씨...‘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야근이 잦았던 누이들은 퇴근이 늦을 때가 많았다.

가끔 퇴근길에 튀김 같은 군것질거리를 사 올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날이 월급날이었지 않나 싶다.

누이들이 즐겨 사온 군것질 거리 중에 단연 ‘오란씨'는 나의 최애 음료였다.

부산에서도 마셔 본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 속 오란씨는 마산 그 어둑한 골목길 끝, 누이들의 자취방에서의 기억이다.

돌이켜보건대 오란씨에 대한 그 선명한 감각은,

어쩌면 맛에 더해진 그때의 상황 때문은 아니었을까...

늦은 밤까지, 오직 누이들의 퇴근만 기다려야 했던 그 막막한 밤들의 무게...

그 무게를 한방에 개운하게 씻겨주었던 그 청량함에 대한 기억... 

......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 드려요~

......


아홉 살 짜리에게 각인된 오란씨의 로고송도 그런 까닭이었지 않았을까.

가끔 내다보던 쪽창 너머의 별무더기들과

시큼한 개울물 위로 뜨고 지고를 반복하던 달의 먼 몸집.

그저 아득하고 먹먹하기만 했던 변두리 골목에서 

누이들과 도른거리던 드문 시간의 기억

가족들과 헤어져 낯선 도시에서 아등바등 정착해 가려던 

스물 한 살, 열 아홉, 그리고 아홉 살 짜리 들이 

서로 보듬고 나누었던 350ml의 위안과 위로들.



#-3. ‘하얀 그림자’의 밤들...     


벨튀 검거 사건 이후, 무료한 낮 시간이 이어졌다.

엄마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길에는

덩그러니 나 혼자 남는 날이 잦았다.

그런 날에 누이들의 퇴근이 늦어지기라고 하면 

왕창 일주일치 숙제를 끝내 놓거나 

누이들이 즐겨 읽던 ‘샘터’ 잡지를 읽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런 밤이면 밤 8시인가, 9시쯤에 귀를 쫑긋,하게 하는 방송이 있었다.     

......

어둠이 내리는 길목에 서성이며

불 켜진 창들을 바라보면서

아~ 아~ 외로운 나 달랠 길 없네

그림자 내 이름은 하얀 그림자

......     

저음의 우묵한 목소리가 전해주던 노랫말은

종종 해 다 진 골목길에 홀로 서 있던 내 모습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언젠가 골목길에 서서

불빛 반대쪽에 내 그림자를 이리저리 돌려 놓아보기도 했다.

비유를 몰랐던 어린 나이에 혹여 자리를 달리 서면 

그림자가 하얘질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돌이켜보면 피식, 웃음이 날 만한 일이지만

어둑한 골목길 끝에 그보다 더 어두운 방으로 돌아가야 했던

아홉 살 짜리 사내애는 그저 그렇게라도 놀거리가 필요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노래의 끝자락엔 묵직한 음성으로 ‘대공수사실록’이라는, 

당시로서는 뜻도 모르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소개되었는데

그 묵직하고도 음산하게 여겨졌던 목소리가 무서워

후다닥, 라디오를 꺼버리곤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하얀 그림자’라는 노래는 한동안 끝자락이 토막 난 채 기억에 남았었다.

‘하얀 그림자’가 무엇인지, 실제 그런 게 있기나 한지,

그런 걸 따져 볼 만한 나이는 아니었으나

그런 날 밤에 종종 듣던 그 노래와 그 작은 방의 분위기는

이후 내 안 어느 한 구석에 딱 그만한 그늘을 만든 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장기 내내 나는 까닭 없이 우울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게 내가 마산에서 겪었던 기억들의 대부분이다.     

벨튀 사건 이후로, 큰 도로 건너 양옥들이 즐비했던 동네(회원2동)는 

금단의 땅이 되었기에 대부분의 기억들은 낮은 담벼락들이 보듬은 

좁고 어두운 골목길(회원1동)에 머물러 있다.

그 골목길 끝, 그믐보다 더 어두운 방 안에 엎디어 

누이들을 기다리며 듣던 ‘하얀 그림자’의 밤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도시 개발로 이제 그 골목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자리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선 풍경들을 보면서

오래 잊고 지냈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기억들 속에서 이제 내 누이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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