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에 들다...
결국, 마산에서의 정착은 실패했다.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도시 마산은,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자유지역’의 호황으로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몰려든 도시였지만,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아홉 살 짜리 사내 아이가 혼자 견뎌내기엔 너무 막막한 도시였다.
그 좁은 방에서 마지막으로 책가방을 챙겼던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늘 어둑했던 골목에 대한 마지막 기억도 선명하지 않다.
부산을 떠날 때와는 달리,
마산에서의 마지막은 배웅을 하는 친구도 없었고 후일을 기약하는 이웃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기억도 없이 나는 마산을 떠났다.
그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갔는지,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넘던 굴현고개와 그 아래 아득했던 도시가
자욱한 먼지 속에 가물거리는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렇게 도착한 버스 정류장 옆엔 내가 다녀야 할 국민학교가
돌담과 탱자나무 담장을 아담하게 두르고 있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는 채 열 칸도 되지 않는 교실들이
담장보다 더 낮아 보이는 지붕을 이고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부산, 마산에서의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그 아담함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아득했다.
이리저리 비틀린 논두렁길을 걷는 일은 서툴기만 해서 한동안 위태로웠다.
삐죽삐죽 연줄기가 돋아 오른 못물을 따라 둑길을 한참 걷다 보면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나의 새로운 정착지는 거기서도 한참이었다.
그 마을 앞을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앞을 막아선다.
고갯길 초입에 선 아름드리 포구나무는 고갯길의 초입을 항상 어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 고갯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마산의 그 골목길이 주던 아득함을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아득한 산자락 아래로 제법 실한 강줄기가 눈마중을 해주었다.
상류로부터 한참을 굽이쳐 내려온 물줄기는 내가 선 산자락 아래를 한번 휘감으며 몸을 틀었다.
고갯길을 내려서면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길을 거꾸로 따라 걷게 된다.
한 굽이, 두 굽이...다섯 굽이를 돌아간대서 마을 이름이 ‘오곡리’였다.
내가 살 집은 그 오곡리에서 다시 한 굽이를 더 돌아들어야 했다.
그렇게 마지막 굽이를 돌아들면 행정구역이 창원군에서 함안군으로 바뀐다.
강 건너는 창녕군이었다.
그렇게 내 유년은 세 개의 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유폐되었다.
사내 애들이 드물었고, 또래 친구는 더욱 없어서, 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혼자인 때가 많았다.
어른들은 언제나 논밭에서의 일과로 집을 비웠고, 텅 빈 마당엔 괜히 어슬렁대는 닭들과
절렁절렁, 요령을 흔들며 여물을 씹는
늙은 소의 눈망울 굴리는 소리만 데굴거렸다.
사랑채 뒤로는,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가 심으셨다는 포구나무가 옆구리를 언덕에 반쯤 파묻고 있었는데,
어른의 몇 아름에도 함부로 둘레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몸집이어서
그 아래를 드나드는 일은 언제나 주눅이 들 만큼 조심스러웠다.
간혹 언덕에서부터 늘어진 뿌리마다에 동네 어른들이 허옇게 앉아 계시곤 했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 풍경은 신선들 같다기보다는 귀신들 같다는 느낌이 더 분명했다.
겨우 10여 호 됨직한 마을은 전부 같은 성씨의 집성촌이었기에 항렬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동네 어른들 앞에선 나보다 어린 아이에게도 ‘아지매’, ‘아재’라 불러야 했다.
한참 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이해 안 되는 마을 풍습은 조선시대나 혹은 제법 실한 규모의 양반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폐된 마을은 겨우 10여 호...그다지 족보를 내세울 만한 씨족도, 마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문을 모른 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그저 그렇게 주눅이 든 채 나의 유년은 유폐되었다.
그러나...
그곳엔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아직 남은 누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밤마다 엄마의 한쪽 젖가슴을 만지며 잠드는 밤이 이어졌다.
여전히 가난했으나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