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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기 minki Nov 11. 2024

흔들리던 풍경들...

-강변마을에서의 한 때...

흔들리던 풍경들... 


마을 앞으로는 제법 너른 강이 흘렀고, 마을 뒤로는 오솔길 하나 없는 산봉우리가 솟구쳐 있어 10여 호의 마을이 먹고 살만한 들녘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 때문인지 마을의 살림살이는 열 다섯의 아비가 고개를 넘던 때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게 없다고 했다.

또래도 없고 사내애들마저 드물었던 그 작은 마을에서 나는 늘 심심했다.

시골의 무료함과 도심의 무료함은 결이 다른 것이어서 도심에서의 무료했던 경험은 시골에서의 무료함을 견디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학교는 즐거웠다.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 등하굣길이었지만 등굣길은 즐거웠고 하굣길은 쓸쓸했다.     

우리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른 어깨 높이의 흙담이 둘러싼 그 낡은 집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허룩하기 짝이 없었다. 대문조차 매달지 못한 흙담 끝엔 금세라도 무너질 듯한, 흙담만큼이나 위태롭게 비틀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수십 년 뒤 집이 허물어질 때까지 흙담도, 그 감나무도 그 자리에서 온전했다.

어느 해 여름, 부산 살던 사촌이 찾아왔던 날인가보다...저 허룩한 수레 하나에 중년의 아버지가 맡긴 생이 흔들거렸다.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는 어린 내 키보다 높아서 거기 앉아서 마을 앞으로 난 길을 내다보는 일이 소소한 일상이 되곤 했다.

그 마루끝에 앉으면 논밭 사이로 난 외길을 통해 마을로 드나드는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소소한 일상품들을 팔러 오는 파란 트럭을 보는 날도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 마을 앞에서 돌아나가는 자가용을 보는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산모퉁이를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파란 트럭과 자가용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좇으며 고개 너머에 있던 도시를 그리곤 했다.

외로움이 가득했던 도시였지만 그래도 시골보다는 놀거리가 많았고 거기엔 또래들이 있었던 까닭이리라.

그렇게 외부 차량들이 빠져나간 길 위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머릿수건 탈탈 털며 돌아오던 동네 아지매들과  동네에 두어 대 있던 경운기가 툴툴대며 흔들리던 풍경으로 하루가 저물었다.

들은 좁고 산은 높아서 마을은 늘 어둑한 그늘 속에 담기던 때가 많았기에 그 어둑한 그늘 속에서 나의 그늘이 더 짙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좁은 마당 귀퉁이엔 할아버지 앓아 누우신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는 축사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절렁절렁, 누렁소 요령 흔들리는 소리에도 온 벽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가마솥 그득 쉭쉭대며 김을 뿜어 올리던 가마솥과 한밤중에 텅,텅, 터져대던 아궁이 속 군불 소리에 사랑채는 온통 들썩들썩 댔던 기억이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숨결은 나날이 낮게낮게 가라앉아만 갔다. 할아버지의 몸을 빠져 나간 숨소리가 증조부 심으셨다는 포구나무로 조금씩 옮겨간 것인지, 사랑채 지붕의 포구나무는 마치 할아버지의 등을 슥슥 긁어대듯이 밤새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긁어댔다.


포구나무 가지 끝에 앉으면 마을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강줄기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 앞의 이랑과 고랑들은 모두 강줄기를 닮아 가지런하게 늘어졌다.

강 건너엔 제법 너른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모래사장이 끝나는 데서부터는 보리밭이 또 그만큼 넓이로 시퍼렇게 출렁거렸다.

낡은 사진첩 속에서 발견한 옛마을 풍경 사진...사진 뒷면에 72. 5. 7.이라고 써져 있다. 내 기억 이전의 사진이다. 누가 찍었는지, 저 배에 탄 사람은 누구인지...
20여 년 전, 길곡을 지나다 옛 생각에 들렀던 장터풍경이다. 그 옛날 마을 어른들은 나룻배를 타고 오가며 이 장터에서 생의 한 때를 꾸려갔다. 옛기억 속의 흥성댔던 풍경은 없다.

장이 열리는 날엔 나룻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그 푸르른 보리밭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곤 했는데, 그 풍경이 어린 마음에도 꽤나 싱그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파장 끝에 담겨 올 꾸러미들에 대한 기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 보면 땅이든 하늘이든 온통 푸르게 흔들렸던 풍경들...그 기억들...

나룻배 종일 출렁대던 나루는 이제 흔적도 없이 메워졌다. 오가는 이가 없던 터라 수십 년 동안 장마 때마다 쓸려온 토사가 강둔덕을 저리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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