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차민기 minki
Nov 22. 2024
강변마을에서 보낸 시간은 햇수로 5~6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그 몇몇의 장면들은 지금껏 내가 살아오는 동안 위안이 되어주기도 했고, 그리움이 되어주기도 했고, 또 때로는 몸서리쳐지는, 잊고 싶은 기억이기도 했다.
#-1. 잠자리와 비행기
서리가 짙게 내린 가을 아침이면 허연 서리를 함뿍 뒤집어 쓴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길가 풀숲에 붙박여 있었는데, 등굣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가슴팍엔 어김없이 그렇게 서리 적신 잠자리들이 훈장처럼 매달리곤 했었다. 장난감이 변변찮았던 시골 아이들에게 그런 생물들은 좋은 위안거리였지 싶다.
아침 조례대 앞에서 길게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노라면, 아이들 머리 위로 서리를 털어 낸 잠자리들이 하나씩 둘씩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등굣길에 매달고 온 잠자리들이 아침 햇살에 날개를 말려 날아오르는 풍경들은 지금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내게도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해 본 때가 그때가 처음이지 싶다. 만약 그때 비행기가 지금처럼 일상의 경험일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 파일럿을 꿈꾸었을 것이다. 가끔 아득히 뻗어 오르는 항적운을 볼 때도 있었고, 번득거리는 반사광 뒤로 아련하게 들리던 비행음이 들리기도 했지만, 그건 그림책에서처럼 그저 아득하기만 한 것이었다. 우리 형편에 비행기를 타는 일은 감히 꿈꿔 볼 수도 없는, 그래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택시 운전사의 꿈...
마을 앞으로는 강이 가로 막고 뒤로는 산봉우리가 우뚝했던 동네에서 나는 외롭고 갑갑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또래들이 소란스레 어울릴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가면 내 안의 깊은 외로움들을 잊고 살 것만 같았다. 택시 운전사를 꿈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비도 없던 시절에 부산의 그 비탈진 골목골목을 헤집어 단번에 목적지를 찾아 가던 그 신기한 능력들이라면 세상 어디든 못 가는 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행기보다 택시는 내게 훨씬 현실적이었고 그것은 구체적 경험으로 체득되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내내 외로웠고 막연하게 무엇인가가 그리웠다. 그래서 한 시간 남짓을 걸어 오가는 고된 등교와 하굣길 위에서, 나의 사춘기는 온통 방황으로 흔들렸다. 비포장도로에 풀풀 날리던 자욱한 흙먼지조차에도 물컹, 슬픔이 씹히던 날들이었다. 이사 온 지 수년이 지나고도 시골의 나날살이는 좀체 적응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부산에서 옮겨온 세간살이들이 그래도 도회지 살림이었기에 아이들은 우리집에 와보고 싶어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우연히 우리집에 다녀간 적 있는 아이가 학교에 우리집이 엄청 부자라고 소문을 낸 적이 있었다. 난 그 아이를 무턱대고 두들겨 팼다. 부모님이 학교에 처음 불려 간 날이었다.
#-3. 슬레이트 지붕과 햇살, 운동화, 그리고 아버지의 책들...
주말이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 흙길을 오갔던 운동화를 씻는 게 그나마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작은 얼룩 하나 없이 박박 문질러 씻은 운동화가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햇살을 튕겨내는 것을 보는 일은 무료한 주말의 작은 위안이었다. 농사가 바쁜 철에도 아버지는 내가 일손을 거드는 걸 원치 않으셨다.
“딴 집 아이들처럼 일할 필요 없다. 너는 그저 공부만 해라. 일하는 것보다 그게 쉬우니 열심히 해라.”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귀에 선하다. 늘 무거웠고 늘 답답하기만 했던 음성...커다란 벽 앞에서 나는 울지도,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늘어갔다. 집안에서든 집밖에서든 나는 넘어설 수 없는 벽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 벽 안에서 나의 도피처 하나는 책이었다. 지금처럼 아동도서가 넘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아버지가 읽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버지는 낮 동안 고된 노동을 하고서도 밤이면 늘 일기를 쓰고 책을 읽으셨다. 그래서 집안 여기저기엔 아버지가 읽다 놓은 책들이 곳곳에 있었다. 2단으로 된 세로쓰기 행들은 의미로나 분량으로나 어린 아이의 눈으로 읽어 내리기엔 분명 버거운 책이었음에도 나는 그저 읽고 또 읽었다. 까뮈의 ‘이방인’,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나관중의 ‘삼국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등을 나는 열 한두 살 때 읽어야 했다. 누구나 처음엔 그러했듯, 뫼르소가 왜 햇살이 좋아 살인을 했다고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난 자모음의 결합을 읽으며 그저 무료함을 잊고자 했던 것같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 이 책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나는 한동안 책 내용보다 그 책을 읽던 그날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었다.
#-4. '사내다움'에 대하여...
열 넷, 혹은 열 다섯...
공부는 점점 뒷전이 되어갔다. 도피처로 삼을 만한 책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랑에서 가르릉거리며 숨결을 낮게 고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겨울밤이면 여전히 포구나무는 사랑채의 슬레이트 지붕을 긁어댔다. 말씀도 못하시던 할아버지셨지만 그렇게 아랫목에 누워 계시는 것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것인지를 나는 그때야 깨달았다. 악몽을 꾸는 날이 잦았고 그런 날엔 엄마 품에 안겨 잠들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사내 자식이 그 나이에 혼자 잠도 못자느냐고 꾸지람을 내리셨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좀더 사내답게 강인해지기를 늘 원하셨다. 그래서 뜬금없이 저녁밥을 먹다가도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되뇌어 보라고 하시는가 하면, 음악교과서에서 배운 노래를 일어서서 불러보라고도 했다. 정말 뜬금없는 지시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머뭇거리다 보면, 아버지는 어느 새 역정이 올라 언성을 높이시며 밥상을 뒤엎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 안 되는 장면이다. 왜 그러셨을까...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고 외로웠을 시골 살림 속에서 그나마 자식으로 인해 위안을 받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5. 아버지의 어깨
이제 아버지의 어깨는 한없이 둥글어졌다. 마을 뒷산보다 더 우뚝해 감히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어깨 위에서 오래도록 온 가족의 생이 버틸 수 있었다. 그 무게 탓이었을까. 이제 아버지의 어깨는 한없이 무너져 내려, 어깨 재봉선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일은 그저 무섭고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보는 일보다 고통스럽다. 온 가족의 생을 떠받쳐 온 아버지의 생이 이제 저물고 있다. 외롭고 무료하기만 했던 나의 십대에, 아버지의 생은 더 외롭고 고단하고 서글펐을 것이다. 나의 외로움보다 훨씬 더 짙고 컸을 그 그늘을 감히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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