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마을에서의 한 때...
강은 마을 삶터의 한계이기도 했고 확장이기도 했다. 강 때문에 턱없이 비좁은 터전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들은 오래도록 가난했기에 그 가난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살길들을 쉼없이 고민해야 했으리라.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까지 마친 아비는 관을 드나들며 마을의 행정을 도맡아 처리했고, 관의 지원금을 적극 활용하여 모자란 살림을 충당하곤 했다. 또 제대로 돈이 돌지 못하는 마을의 사정을 간파하고 도시에서 마련해 온 현금을 종잣돈 삼아 마을 사람들에게 이자를 놓았다. 그게 고리대금인지 은행 수준의 이자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재에 밝았던 아비의 평생을 가늠해 보면 결코 싼 이자는 아니었으리라 여겨진다.
마을의 모든 아재들은 그 동네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다. 대대로 그 좁은 터를 물려받아 농사를 배우고 익힌 이들이었기에 모두가 고만고만했던 그들의 살림은 어쩌면 가난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결핍의 나날들 속에서 어린 우리들을 설레게 했던 것은 5일마다 번갈아 열리던 장날이었다. 특히 발동기관이 달린 장배는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창녕군 남지장터에, 하류로 흘러 내리면 밀양군 수산장터에 닿았는데, 한 철 수확물들을 이고 진 마을 어른들은 그 물길을 따라 오가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날엔 하루 종일 마음이 콩닥거렸다. 장을 파하고 오는 어미의 빨간 대야는 지금으로 치면 ‘언박싱(unboxing)’의 설렘이었던 셈이다. 통,통,통....아득히서부터 들리던 발동음 따라 콩,콩,콩...심장이 콩닥대던 그날들의 설렘...돌이켜보건대 요즘의 택배는 그에 비할 만한 것이 결코 못된다.
멀리서 발동선 기관음이 들리면 아이들은 강둑으로 우르르 쏟아져, 벌겋게 달아오른 저녁놀을 배경으로 떠오는 장배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아이들은 강물 한끝으로 잠기는 저녁놀을 함뿍 머금어 그 자체로 빠알간 꽃송이처럼 흔들렸다. 강변마을에서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변마을을 떠난 뒤에도 간간이 해질 무렵을 맞추어 그 강변에 서보곤 했던 것도 그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지만, 기억의 왜곡인지 기후의 변화 때문인지 이후로 그런 풍경을 만나 본 적은 없다.
한여름밤의 강은 은근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마을 아지매들은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수건 한 장 달랑 챙겨 들고 강둑으로 내려섰다.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밤이어서 깊지도 않은 강은 어스름이 깔리고 나면 금세 오딧빛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 깊은 먹빛의 어둠이 깔리면 마을 아낙들은 찰박,찰박, 그 강물에 몸을 씻었다. 변변찮은 세면 시설이 따로 없었던 때라 한여름의 강은 낮이면 사내들을, 밤이면 아낙들을 번갈아 품어 주었다. 해가 지면 모든 것들이 고요 속으로 빠져 드는 외진 산자락 마을에서, 밤마다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물소리는 어쩌면 당시 마을의 숱한 사내들을 설레게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가끔 “누고? 언넘이고?”라는 선 굵은 아지매의 목소리가 간간이 한밤 고요를 찢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 그 어둠 속을 엿보는 일로 은근한 밤을 겪었음에 분명하다.
그렇게 간밤의 소란이 지나고 나면 마을은 아무렇지 않게 늘 그대로의 하루를 반복했다. 어른들이 강을 비우는 시간, 즉 한여름의 땡볕이 강물을 데우는 시간엔 고개 너머의 아이들까지 합세해 강은 흥성거림 그 자체였다. 변변한 튜브도 없이 맨몸으로 뛰어들던 아이들에게 자기 키의 몇 배나 되는 강심은 훌륭한 놀이터였다. 아직 2차 성징이 오기 전의 아이들에게 성별은 의미 없는 것이어서 그저 아랫도리 속옷 하나만으로도 첨벙댈 수 있었던 날들...
몇 년에 한번, 간혹 물난리가 날 때면 그 순하디 순하던 강물은 무섭게 돌변했다.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마을 앞을 드세게 지나치던 물살 속에는 갖가지 것들이 따라 흘러 내렸다. 초가 한 채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던 때도 있었고, 돼지며 소같은 가축들이 길게 울음을 흘리며 허우적대는 꼴을 볼 때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 불어난 황톳물이 천천히 빠지고 나면 마을 앞은 켜켜이 혼돈의 시간들로 덮여 있었다. 그 와중에 마을 사람들은 돈 될 것들과 돈 되지 않는 것들을 재빨리 가려 하나라도 선점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다. 어떤 이는 채 여물지 않고 떠내려 온 과실들을 가려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어느 목재소에서 떠내려 온 듯한 아름드리 버드나무 둥치를 톱으로 썰어 내기도 했다. 아이들은 눈치껏 어른들의 일손이 닿지 않는 자리쯤에서 그때껏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장난감들을 캐내기도 했다. 제한된 재화로 인해 경쟁이 치열했던 자본 시장의 속살을 나는 벌써 그 나이에 눈앞에서 실감나게 목격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강변마을에서의 몇 년은 내 외로움만 키운 게 아니라 내 안의 서정을 키운 시간이기도 하다. 도회지에선 결코 만나지 못했을 크고 작은 목숨들과의 만남, 시시때때로 변모하던 일상의 풍경들은 한자리에 앉아 그것들을 가만히 한참 동안 바라보는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땐 그게 무료함의 탈피라고 여겼으나 그것이 내 감성의 근간이 되고 내 문장의 샘이 되었음을 훗날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강이 보이는 곳에서 내 생이 멎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거나 삶터 근처로 나들이를 갈 때면 강변의 풍경을 유심히 살피곤 한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디쯤, 내 생의 마지막이 머물 만한 곳이 있을까 보아.
밤새 고요하던 물살이 아침이면 쨍,한 햇살에 소스라쳐 깨는 강변의 일상...그만한 마지막이면 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