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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Feb 06. 2024

부모님의 작은 집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집은 부산 어느 언저리 2층집 단칸방입니다.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자고 일곱 가정이 건물 밖 공동화장실을 썼던, 80년대 초반에 흔했던 집입니다. 연탄 아궁이가 방에 있어 세 살 어느 날 죽솥에 팔을 뎄다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왼쪽 팔꿈치 아래 흐린 흔적으로 남은 그곳을 위해 젊은 부모님께선 얼마나 마음쓰셨을까요.


아홉 살 3월 25일에 방이 두 칸 있는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마당 넓고 주인 할머니까지 다섯 집이 사는 월셋집이었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새 집에 가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500원짜리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라면이 100원 하던 시절 완두콩이 듬뿍 들어간 짜장면은 입학식,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제가 안방을 쓰고 오빠와 남동생이 작은방을 썼습니다.


열한 살 어느 날 옆방 살던 분들이 이사 가시면서 방이 하나 비었습니다. 그 방을 오빠와 동생이 쓰고 작은방을 제가 쓰게 되었습니다. 혼자만의 방, 창이 동쪽으로 난 공부방이 얼마나 기쁘던지요. 신형원의 <작은 창> 닮은 방에서 스물일곱 살 2월까지 책 읽고 공부하고 일기와 여러 글을 썼습니다. 먼 곳에 발령받아 자취할 때, 결혼하고 아이들 키울 때 그 방이 종종 그리웠습니다.


밖에서 이 닦고 세수하는 집, 재래식 화장실 쓰는 집이었지만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높은 곳에 있어 용두산공원까지 두루두루 보였고, 너른 마당에는 주인 할머니께서 가꾸신 봉숭아와 분꽃이 가득했습니다. 키 큰 무화과나무에 주렁주렁 무화과,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던 무궁화는 한 해 두 해 흘러도 늘 그대로였습니다. 밤이면 달빛이 그윽하게 찾아왔습니다. 아주 가끔 별도 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집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할머니도 별이 되셨고, 부모님은 새 집을 알아보셨습니다. 막내가 태어나던 해 부모님은 31년 동안 정든 집을 떠나 다세대주택 꼭대기 층으로 옮기셨습니다. 겨울에 내려가니 방이 넓고 집 안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옛날 그 동네가 더 편하다 하십니다. 오랜 이웃들이 있고 마음 한켠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은 그곳.


작년에 부모님이 한 번 더 이사하셨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 작은 집을 얻게 되어 여름부터 가을까지 바쁘셨습니다. 행정구역상 40년 사셨던 곳과 가깝고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그곳. 이사 준비하면서 동생이 찍어 보낸 사진 보며 '이제는 부모님이 조금 더 편하시겠다!' 집안 어른들도, 부모님 친구분들도 집 좋다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찾아뵈면서 저도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8년 전 장혼(張混 1759~1828)의 <평생지(平生志)>를 읽었습니다. 인생 후반 어렵게 얻은 집에 이이엄(而已广)이란 이름을 짓고 가난하지만 소박한 일상에 자족하던 사람. '이이(而已)'는 '~일 뿐이다' 또는 '~이면 그만이다', '엄(广)'은 '집'입니다. 한유(韓愈 768~824)의 시 "허물어진 집 몇 칸뿐[破屋數間而已矣]"에서 따온 말을 자신의 호와 서재, 집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비 오는 아침, 눈 내리는 낮, 저녁 풍경, ​새벽 달빛은 그윽한 삶의 신비로운 운치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다. 말해 준다 해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평생의 소망이다. 그뿐이면 된다." 새벽에 깨어 <평생지>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습니다. 부모님께서 새로운 집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 인용한 글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其雨朝雪晝(기우조설주), 夕景曉月(석경효월), 幽居神趣(유거신취), 難可爲外人道也(난가위외인도야). 道之而人亦不解焉耳(도지이인역불해언이). 日以自樂(일이자락), 餘以遺子孫(여이유자손), 則平生志願(즉평생지원). 如斯則畢而已(여사즉필이이)."


* <작은 창>(신형원)

- 어린 날 라디오로 아껴 들었습니다.

https://youtu.be/D9rNuZZACas?si=7G4xb9cU6RI__t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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