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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Dec 08. 2024

나이 탓

https://groro.co.kr/story/12979



 얼마 전에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막 추워지던 시점이었던 거 같다. 가을이 가고 이제 겨울이 왔다. 날이 춥다. 뭐 이런 때였다. 해서 라디오에 올라오는 사연들도 대부분 그런 내용들이었다. DJ는 사연을 읽고 공감하면서 추워지는 날씨 잘 대비하면서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준비를 하자 뭐 이런 반응을 보였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 평범한 그런 순간이었다.



 그러다 한 사연에 대한 DJ의 반응이 살짝 거슬렸다. 사실 DJ의 반응이 잘못된 건 없었다. 적절한 뻔할 정도로 평범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거슬렸다. 내가 조금 꼬인 사람이라 그렇긴 한데 여하튼 거슬렸다.



 사연의 내용은 이랬다. 이제 60대가 된 배달기사인데 날이 추워져서 그런 건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배달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보면 무릎이 많이 시리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나이 탓 아니고 날씨 탓이겠죠? 하고 묻는 형식의 사연이었다.



 DJ는 바로 ‘맞아요, 맞습니다. 나이 탓 아니고 날씨 탓입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하고 웃으며 한 두어 마디 듣기 좋은 소리를 더 하고 이어 노래를 틀어 줬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예상되는 괜찮은(?) 반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렇다. 맞다. 지극히 괜찮은 반응을 했다. 그런데 난 거슬렸다.



 아니, 나이가 육십이 넘어갔다는 건 우리 몸을 육십 년을 썼다는 소린데 그럼 어느 정도 삐걱거리고 탈이 나는 게 정상 아닌가? 그걸 나이 탓이 아니고 날씨 탓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쩌면 무책임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나이 탓을 날씨 탓으로 뭉개는 게 맞는 건가?



 굳이 따지면 나이 탓도 맞고 날씨 탓도 맞다. 나이가 들었어도 날이 춥지 않으면 신경 쓰일 정도로 무릎이 시리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날이 좋아 그런 거지 근본적으로 나이가 들어 시릴 수 있는 요인은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는 거 아닌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왜? 우린 나이 먹는 게 싫으니까! 나이 먹어가면서 늙어 가는 힘이 점점 없어지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처량해지니까! 그런데 어쩌랴! 자연의 섭리에 의해 나이를 먹는 것도 몸이 늙는 것도 힘에 부치는 것도 모두 정해진 수순인 것을. 왜 그걸 애써 외면하려 하느냐 이 말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그런 건지 이 정도 추위에도 무릎이 시리는구나. 40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고 50대까지만 해도 안 그랬던 거 같은데 60대가 되니 이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구나. 그러니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몸이 반응을 하는구나. 그럼 날씨 탓을 하면서 외면할 게 아니라 조금은 낡은 몸을 보완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때의 DJ가 너무나도 나이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뉘앙스로 오롯이 날씨 탓이라고 말을 해서 내가 민감하게 반응한 걸 수도 있다. ‘네. 날씨 탓이 맞습니다만 나이도 조금 생각하셔서 대비하면 조금 더 건강하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정도로만 이야기했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못난 것도 잘난 것도 내 모습이고 젊었을 때도 나이가 들어가는 이 순간도 모두 내 모습이고 나를 이루는 요인이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못난 거 한 두어 개 잘 개선하면 잘난 게 될 수도 있고 젊었던 모습이 쌓여 지금의 나이 든 괜찮은 내 모습이 완성된 거기도 하다. 못난 건 못난 대로 잘난 건 잘난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지점이 못난 거고 잘난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경계가 모호해진다기보다 묘하게 균형이 맞는다고 해야 될까?(이런 게 엔트로피인가?) 그 순간 아마도 가장 괜찮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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