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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을 많이 마셨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마신 거 같다. 술과 함께 먹은 안주를 정말 오래간만에 다시 다 확인했으니 말이다... 처가가 이사를 해서 아내의 언니도 내려와 어제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맛있는 회를 안주로 삼아 소주, 맥주 그리고 양주도 마셨다. 좋았다. 안주도 좋고 술도 좋고... 하지만 속은 이래저래 쓰린 날이었다. 술을 마셔 쓰린 건 아니었고 쓰려서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마셨는데 더 쓰려졌다.
만화 미생에 나오는 말이 있다. 술은 기분 좋을 때 마시는 거라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을 마시면 그 화가 다 올라와 힘든 거라고.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어제가 딱 그랬다. 공교롭게도 평소엔 잘 마시지 않던 양주까지 마셔 그 화는 더 크게 치밀어 올라 결국 내 몸을 잠식해 버렸다. 그 결과는 앞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걸 다시 다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죽을 거 같은 새벽을 보냈다.
모든 걸 다 확인하고 일어난 아침은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뭔가 속이 허 했다. 아내의 언니가 아직 올라가지 않아 아내는 점심을 같이 먹으로 다시 처가로 갔다. 아내와 아이를 처가에 데려다주고 시간이 조금 있어 집으로 다시 돌아와 허한 속을 달래기 위해 뭘 채워 넣으면 좋을까 고민하다 라면이 생각났다.
스물한 살의 어느 날 역시 친구와 오지게 술을 마시고 술병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다. 정말 모든 걸 다 게워 내고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바는 하러 가야 해서 정말 그야말로 죽을 거 같은 몸을 이끌고 일하던 노래방으로 출근했다. 친구가 노래방으로 찾아왔다. 엔간히 많이 마시긴 한 거 같다.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고 그렇게 걱정이 돼서 다음 날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날 장사 준비를 위한 청소를 마치고 친구와 라면하고 김밥 뭐 이런 것들을 시켜 먹었다. 속이 너무 풀리지 않아 죽을 거 같았는데 일단 라면 국물이라도 한 숟가락 먹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라면이 왔고 먹는 즉시 다시 다 게워 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일단 국물을 먹었다. 놀랍게도 속이 바로 풀렸다. 너무나도 시원했다.
오늘 아침에 20여 년 전의 바로 그 라면 국물이 생각난 것이다. 일이 있어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후다닥 끓여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밀어 넣었다. 이미 속은 어느 정도 풀려 있는 상태라 그때만큼의 쾌감은 없었지만 역시 시원했다. 다 게워 내고 놀란 속이 다시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라면도 천천히 먹었다. 중간중간 계속 국물을 떠먹었다. 반 정도 먹다 보니 속이 마저 풀렸고 빈속도 채워지는 포만감이 좋았다.
술은 기분이 좋을 때나 많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