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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Sep 03. 2023

악마는 소망하지 않는다

더구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지 않고, 내일을 믿도록 조종한다.

  모든 절망이란 소망을 품었기에 발생하므로, 당연한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차피 소망이란 현재에 있지 않고, 아직은 오지 아니한 미래를 지향하기에 악마는 사람의 눈을 미래(내일)로 향하도록 조종한다. 바로 그곳이 인간의 모든 탐욕과 우려와 염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소망하되, 비단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의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할 것이다 (마태복음 6:34)


  경험이란 실전을 치룬 결과의 착오법으로 터득하여 성취에 근접하는 방법이므로 경험을 다소 보유하고 있다면, 관계에 있어서 맺고 끊어냄이 대체로 능숙한 편이다. 일견 생각해 보면 남을 상대하는 비즈니스는 연애와 흡사하게 닮아있다고 판단한다. 경험이 사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시피, 관계에 있어서 연애란 본선에 앞서는 예행연습이고, 결혼은 실전이다. 그래서 연애의 무덤이 결혼이라는 독설은 아프지만 불편한 진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거나 공포스러워할 이유는 없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과감히 소망을 버린다면 비록 무덤이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중 하나를 버린다고 두개가 성취 될 것이라는 오해 역시 금물이다. 셋은 전적으로 동질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무겁건 가볍건 연애는 실험실습의 과정으로 마감될 가능성을 지니건만, 결혼은 평가전이 아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치사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자 실존적인 상황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로 카드에 등장하는 악마. 천사가 변절하면 악마가 된다는 것은 모르거니와 뜬 소문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들과 딸이 청춘을 벗어나 점잖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아름다운 시절이 속절없이 지나감을 애석하게 생각해 왔다. 실은 '점잖다'라는 의미 자체부터가 슬프다. 이 단어가 지니는 본뜻은 '젊지 않다'라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서 성장이란 불가피하되, 생존 그 자체가 정당하지 못하고 치사 무쌍하기에 험한 세상에 내던져진, 그런 생테계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내야 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무겁고 한결같이 짠하다.


  야망이 비굴해지면 소망이 된다는 것쯤은 모르는 바 아니다. 허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비굴해져도 무방하다는 느낌이 들기에, 나의 소망을 공개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않으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러나 본인의 얘기가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강력한 무기인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이불을 덮고 함께 살고있는 아내 얘기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근 사십 년을 함께 하였건만, 나는 여태 아내를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꾸는 꿈이 흉몽이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껏 이혼이나 졸혼 따위를 선언하지 않고, 조무래기들의 운동회 줄다리기처럼 긴장력을 동원하여 개기고 있음은 그나마 잘 살고 있다는 막강한(?)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아내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이유가 궁금한가? 안 궁금해도 전혀 상관이 없고, 절대로 감정이입은 사절이다. 불행할수 있으므로.....


   도장을 찍기전에 아내는 전혀 잔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가녀린 허리 사이즈에 비하여 하여튼 넉넉하고 풍성한 인격의 소유자였다.(으윽... 여기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더하여, 제 짝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다독여 줬지만, 도장을 !찍고 세월이 지나면 바뀌는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내의 잔소리와 나의 바람은 머나먼 정글같은 어지러운 착각이었다.

  느낌과는 달리 아내의 주장은 잔소리야 말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관심이 없다면 잔소리도 안 한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는 골백번 생각해 봐도 논리적 오류가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이 틀어지고 변질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느낀다는 것만큼 중요한 사실은 없다고 판단해 온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참으로 진지한 착각이었다. 아내가 바라보는 방향과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내모르는 사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풍화시키고 또 침식시킨다. 도대체 이것은 신의 섭리인지, 나의 착각인지, 아직도 구분되지 아니한다. 살아가면서 변해가는 가치관의 차이는 불가항력임을 한참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의 해법은 비로소 논리에 있음을 아내에게 구구절절 설명한들 아내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당신의 논리는 개나 줘버리세요!'

  으윽..! 나는 논리적으로 디테일한 악마인가? 적어도 아내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치관을 개나 줘야하는 헛소리로 취급되는 판국에 나는 거듭 절망하고야 만다. 세상에! 선호하는 요리의 메뉴가 서로 같기를 나는 원치 않건만,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서로의 기댓값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예를들어, 최소한 이 정도면? 하고 추정을 하면, 그러한 추론의 개념박살이 난다. 아내는 이미 최대한을 마지노로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정치의 원점이 금성과 화성의 차이 만큼이나 다른것이 거의 확실하다. 서로 같지 않고 다름을 한탄스럽게 바라보는 내 시야는 왜곡된 소망에서 발현된 문제일 수 있다. 당연히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헛소리를 브런치 플랫폼에 공개한 여파로 아내의 잔소리에 갈굼을 당하지 않으려면 배반의 결심을 해야한다. 그러니까, 마치 남산에 끌려와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나리오에 걸맞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마치고 서명날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께 살아온 흔적과 함께 인내한 세월을 의심치 않기에,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 아내를 수천 만 배는 더 사랑하노라고...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서러울 것도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소망이란 악마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사뭇 의심스럽다. 빌어먹을 소망 같으니...

(오버로크 아래의 볼딕으로 처리된 사족은, 시인 김수영 님의 명시 '거미' 중 일부를 차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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