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경 Jul 29. 2023

호모 테크니쿠스의 변명

존재는 관계의 그림자인가?

첫 번째 유기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은 몹시 난해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도 해석에 어려움이 많다. 독어로 쓰인 텍스트를 번역한 결과이니 원문에 능통한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러려니 하건만, 평범단어 나열에 불과하건만 문맥이 심상치 않기에 중언부언으로 해석하기 쉽고 딱 그 말이 그 말 같다. 그의 철학적 사상을 조망한 텍스트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내용이 없는 존재적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이성의 직관은 맹목이다. 따라서 선험이 없는 이란 속이 타앙 비어있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가차 없이 면도칼을 들이미는 방식으로 칸트를 정리하다 보면, 문해력 부족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건만 그런 것들은 개의치 않는다. 사상을 전달하는 언어의 표현체계에는 테두리(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건 결코 현학적 해석이 아니다. 이른바 칸트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근대 철학의 대가라도 감히 그의 사고 구조에 면도칼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나는 누구인가(Who am I)와 나는 무엇인가(What am I)라는 질문은 종속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분석해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을 지닌다. 칸트 역시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고, 그때까지 완전히 정의되지 아니한 정신과 물질의 문제였기에 이성과 자아에 관한 한 적어도 칸트와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구조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칸트의 그럴듯한 사기성 농후한 사고실험과 결별하였고 그의 저서들을 다락방에 수감시켰다.


두 번째 유기물,

  사람 또는 인간은 포유강 영장목 유인원(상) 사람과 사람 속에 속하는 동물이다. 다른 동물과 구분할 때는 인류(人類)라고도 부르지만, 과학사적으로 더듬자면 현생 인류는 유사한 종이 죄다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이 생존해 있다. 헝가리계 스위스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집필한 액자식 소설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호모 사피엔스에서 분화하여 쪼개진 호모 구라쿠스(?)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하고 있다. 미장아빔 수법으로 전개되는 지루한 1, 2부를 읽고 3부로 넘어가면...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다 거짓말이었다 라며 또 다른 거짓말을 서슴없이 시작한다. 미심쩍은 제3부 '50년간의 고독'을 마치고 나면 완전히 당했다는 느낌뿐이다.

  호모 테크니쿠스가 호모 구라쿠스를 사상적으용서할리가 만무하다. 과연 존재는 관계의 그림자란 말인가? 속 시끄럽고 심란한 배신감을 인내하기 싫은 까닭에 나는 또 과감히 크리스토프를 다락에 버렸다.


 번째 유기물,

   '아름답다'라는 의미는,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는 형용사로 정의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름답다는 의미와는 영 다르다.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는 이 답다'라는 의미와, 나무의 직경이나 크기를 측정할 경우와 같이 한아름 또는 두아름의 의미에서 '안아 봄직하다'라는 형용사에 기인하였음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본시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이건만, 아름답다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 판단이거니와, 소위 미학이라는 학문은 관적 형틀(테두리)에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강제성에 의미를 두고 있음이 다소 의심스럽고, 그들만의  절름발이 논리에 불과하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다.

  혹여, 황무지가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개간되지 아니한 원시의 상태 그대로를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은 현상학적 차원에서 불가능한가? 자연스럽황금비축조된 구조물이나 과장된 조각들로 꾸며놓은 정원이나 물꼬를 틀어 장황하게 편집해 놓은 분수 따위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감탄하거나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언급하는 미학이란 온전히 인위적 꾸밈이나 상을 구체화한 표현에 불과하기에 포괄적 아름다움인 황무지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미학적 해석은 과연 아름다움의 축척으로 확대나 축소될 수 있는가? 교과서적 아름다움이란, 비로소 다듬어 꾸며야만 하는 미학적 표상으로 강요된다. 그래서 미학에 관한 지침서와 흔적들을 또 다락에 버렸다.


그 이외 버린 잡다한 유기물들,

  버릴 것은 죄다 버려야 한다는 유의미한 철칙에 따라,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음 직한 전집이나 20세기 판본의 전공서적, 해묵은 기술보고서, 시시콜콜한 지난날의 기록들과, 케케묵은 사전 따위의 쓰레기 들을 또 다락방에 처박았다. 이것 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으로서 거듭 의미가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 분리수거 작업이 귀찮아 휴지통을 비우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언젠가는 주변머리를 어지럽히는 저것들과 반드시 결별하게 될 것이다.


  나는 경멸하거니와, 골치 아프고 쓸모없는 방구석 이념의 지식들은 살아가는 테마에 견주어 죄다 사기와 진배없음을 뼈아프게 체험한 바 있다. 인간으로서 '완전한 인식'을 간절히 원한들, 그것은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궁금하거든 딱! 사흘만 굶어보거나, 소주만으로 일주일을 살아보면 파악할 수 있다.


  호모 테크니쿠스는 비록 호모 구라쿠스를 용서치 아니할 망정, 갈릴레오처럼 상호 이익을 전제로 거대오류와 타협하거나 논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아내의 화장끼 없는 원초적 외양을 지극히 아름답다고 판단한다. 물론 호모 테크니쿠스라도 착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항청과 타협으로 거래를 마친 갈릴레오는 죽는 순간까지 자택에 수감되는 형벌을 받았고, 이후 꾸준히 태양의 공전여부를 연구하였지만 그 결과를 세간에 발표하지 않았기에 연구 결과는 과학계에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이후 다른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 결과로 드러난 바, 우리가 발을 붙이고 있는 지구만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붙박이 항성으로 알려진 태양도 수십만 광년 거리에 있는 우리 은하의 축을 중심으로 수십억 년에 1회 주기로 유유히 공전하고 있음은 입증된 사실이다.


  나는 내일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수 있다. 그따위 시시콜콜한 사실은 별로 대수롭지 않거니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미토콘드리아라는 원시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점이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유한한 가능성의 확률이었다 허망하다. 나는 무엇인가...?

카악 퉤! 미쳐버린 진화 생물학 같으니...

이전 03화 사람 값의 평가방식 유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