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다가오는 연말,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다른 날의 연장일 뿐인데 각종 매체마다 마치 지구가 곧 멸망이라고 하는 것처럼 요란스럽다. 나는 조용한 연말을 좋아한다. 사실 부서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3종세트 마지막 프로젝트가 직원 화합대회였다.
하지만 돌아보니 어느덧 11월말, 일정치 녹록치 않았다. 아직 끝내지 못한 시범사업이 있었고 내년도 신규시책 보고회도 며칠 남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젊은 세대는 회식이니 모임이니 하는 단체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중간에 소규모 식사는 몇 번 있었다. 생일 축하도 있었고, 구내식당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문을 닫은 날에는 다 같이 근처 식당으로 우루루 몰려가 회식 아닌 회식타임을 갖기는 했다. 그래서 이들도 굳이 화합이니 단합이니 하는 명목으로 자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단정하고 있었다. 또 괜히 그런거 하자고 말을 꺼냈다가 ‘리얼 꼰대’ 소리 들을까봐 말을 꺼내지 않은 것도 이유이긴 하다.
12월을 이틀 남긴 어느 날, 티타임 시간에 주무팀장이 ‘화합대회’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내 말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깜빡했다는 듯이 “그러게요.”하며 난감한 듯 팀장들 얼굴만 살폈다. 누군가는 마침 송년회도 해야 하니 연말에 묶어서 하면 좋겠다고 했지만 또 다른 팀장이 안된다고 했다. 먼저 ‘화합대회’를 하고 송년회는 12월 마지막 주에 하면 된다는 거였다. 나는 눈치를 살폈다. 대충 보니 따로 하자는 쪽이 3명, 묶어서 하자는 쪽이 2명이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했다.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 우물쭈물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조용한 연말 이기를 바랬다.
코로나19라는 펜데믹이 끝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회식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거였다. 팀장들이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부서회식과 화합대회의 모든 결정은 부서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정하기로 했다. 필요하면 투표도 하고 단톡방에 좋은 아이디어를 올리자고 하면서 티타임을 마쳤다. 요즘 부서장은 회식매뉴나 화합대회 종목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예전 과장들은 직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의견을 말하면 “어이,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자구.” 라며 모든 일정이나 장소, 음식 매뉴가 자기 뜻대로 정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지금은 절대 그럴 수 없다. ‘의사소통’을 조직 활성화의 최고 화두로 삼는 이때 부서장은 발언권만 있는 구성원 중 한 명일 뿐이다. 그 중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팀장이 퇴근 후 간단히 운동경기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게임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볼링’으로 정했다. 그 자리에서 의견이 모아졌다. 곧바로 서무 주무관이 일정 조율을 위해 단체톡방에 투표를 올렸다.
12월 첫주 목요일, 퇴근 후 우리는 볼링장으로 갔다. 지난 7월 정기인사에 1명이 충원되면서 총 24명이었고 4명씩 6개 팀을 만들었다. 레인별로 3게임을 하고 무조건 점수가 많은 팀이 우승이었다. 팀별 조원은 개인별 수준을 고려해서 상, 중, 하를 골고루 섞었고, 어느 누구도 마이볼(마니아가 개인별로 소장한 자신의 볼링공)을 사용하지 못했다. 볼링장에서 빌려주는 신발과 공만 사용했다. 게임은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보다 세 게임을 한다는게 쉽지 않았다. 평소 볼링을 거의 하지 않아서인지 핀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열심히 굴렸건만 볼이 옆으로 삐딱하게 굴러가다 골로 냅따 떨어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짜증도 늘어났다. 실력은 없는데 욕심은 있는 거다.
당연히 내가 속한 팀이 꼴찌였다. 내 실력이 모자란 것도 있지만 상급이라던 직원이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부서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셀프디스를 해줬다. I형들이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이들은 볼링장이 떠나가게 소리지르고 응원 했다.
스트라이크를 날리면 주인공에게 달려들어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초보라 볼링공이 앞이 아니라 뒤로 떨어져도 ‘괜찮아’를 합창했다. 외향이냐 내향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과 취미의 차이였다. 게임이 끝나고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전에 우리는 간단히 시상식을 했다. 연말 부서평가에서 좋은 결과가 있어 상금이 꽤 있었다. 단체상과 개인 MVP 그리고 응원상까지. 되도록 6개팀이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안배 했지만 말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 없이 우리는 그저 웃고 많이 떠들었다. 이렇게 잘 놀고 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사무실 안에서는 왜 그렇게 조용할까?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조직이 주는 중압감이 우리는 옥죄는 거겠지. 앞에 놓인 돼지갈비가 지글지글 잘도 익는다. 그래도 과장이라고 마주 앉은 주무팀장이 잘 익은 고기를 내 앞에 가져다 준다. 평소 말이 없고 점잖은 그가 오늘은 활력이 넘친다. 볼링에서는 최강자 였다. 우승팀이었고 개인MVP까지 받았다. 사무실에서의 그와 볼링장에서의 그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그렇게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들이 게임이 시작되자 진지한 야망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볼링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자세와 열 개의 볼링핀을 쓰러뜨리고 말겠다는 투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열정이 그대로 업무에 적용되면 참 좋을텐데. 라는 정말 재미없는 생각을 하며 못된 ‘부서장 회귀본능’을 잠재웠다.
‘고기가 타고 있어요, 어서 드세요.’ 여기저기서 술잔이 부딪히고 고기가 뒤집혀진다. 부족한 반찬을 채우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고기가 부족하다며 더 먹어도 되냐고 묻는 MZ들, 화합대회가 주는 에너지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래, 인생 뭐 있냐? 이게 재미지. 직장생활도 이런 맛에 다니지 않냐는 예전 선배들에게서나 들었을 법한 말투가 여기 저기서 흘러 나왔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어째서 요즘 젊은층들은 싫어할까? 최근에 안 사실은 젊은층들이 회식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부서장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끼리 있을 때와 윗 사람과 있을 때의 온도 차이가 엄청나다고 한다. 참 아쉽다. 그들도 결국은 나이를 먹는데 말이다.
화합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뿌듯했다. 온전히 즐기는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사무실에 첫 발을 내딛던 그 날, 그 생소하고 낯선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는데 불과 일년도 안되어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즐겼다.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괜찮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업무에 대한 열정도 그리고 자기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오늘 게임을 함께 하면서 서로를 응원했다.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울리면서 남들 회사생활 하듯 먹고 떠들었다. 그렇게 또 한해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