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기정 Mar 11. 2024

[에세이] "안 쓸 거니까 n만 원만 드릴게요"ep.1


나는 외주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선결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뢰된 외주 작업의 최종 결과물이 완성되고, 그것을 의뢰자에게 보여준 뒤 최종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결제를 받는 식이다. 만약 최종 오케이를 받기 전에 의뢰자가 수정 요청을 하면 몇 차례고 요구에 맞춰서 수정을 해준 뒤 결제를 받는다. 내가 하는 결제 방식이 남들이 보기에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일 텐데, 나는 이미 여기에 적응해 버려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사건이 터져버렸다.


사실 여태껏 외주를 받으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이런 나의 결제 방식을 염려해 주긴 했다. 만약에 의뢰자가 최종 결과물만 받고 도망가면 어떡하냐고, 선 결제를 받아야 마음이 편하지 않냐고 하는 목소리들을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걱정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걱정하는 소위 "빌런"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다지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만난 의뢰자들은 전부 친절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나를 존중해 줬었으니까. 뱀에 물려본 적이 없어서 뱀을 무서워하지 않아 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아무튼, 그랬다. 그렇게 살다가 제목으로 보이는 "안 쓸 거니까 n만 원만 드릴게요"를 최근에 들었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실제로는 저렇게 짧은 문장이 아니었는데, 제목에 쓸 수 있도록 줄이고 줄이다 보니 이렇게 됐다. 아무튼, 사건의 의뢰는 게임 시나리오 작업이었는데, 기존의 밋밋한 시나리오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고, 흥미롭게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인 작업이었다.


우선적으로 기존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작지 않은 일이었기에 작업에 대한 견적은 20만 원으로 합의 끝에 결정됐었다. 다시 말해서, 의뢰자와 내가 함께 도출해 낸 견적이 20만 원이라는 거다.


견적을 세운 후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 게임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할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서 최종 작업물을 완성했다.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정성이 들어갔던 작업이었다. 의뢰자 역시 나의 작업에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최종 결제만을 앞두고 이번 작업도 좋게 마무리가 되겠구나 싶어 보람찬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의뢰자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긴 메시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줄이자면, 의뢰자가  나에게 의뢰를 해 내가 쓴 새로운 시나리오가 게임 개발 팀 회의에서 좋지 못한 반응을 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뢰자 자신이 보기에도 좋았던 시나리오는 당연히 실제 게임에 적용될 줄 알았으나 그러지 못했고, 내가 쓴 최종 작업물 시나리오는 쓰이지도 않는 쓰레기가 되어버렸으니 기존 견적 값인 20만 원은 지불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ep.2로 이어집니다)


이전 01화 [에세이]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