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고 6주가 지날 때까지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기에 주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다녔다. 동생이 시간이 될 때는 서울의 남동쪽 끝에서 북쪽으로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6주 동안은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어야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오른쪽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운전은 불가했고, 택시를 탈 때에도 휠체어를 접어서 차에 실어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는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혼자서는 병원진료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동생, 이웃집 언니, 부모님 등 주변에 가용한 모든 사람들의 도움을 한 번씩은 받은 것 같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동행서비스도 생각해 놓으며 진료를 이어갔다.
병원을 갈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도와준 사람들은 기꺼이 기쁘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부탁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사회성'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이라고 정의한 어떤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것일까? 도움을 요청할 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우연히 받는 도움 또한 항상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의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도움 받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내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내 상황에 익숙해져 갈 때즈음, 그날도 병원 재활치료가 끝난 후 플랫폼 서비스로 택시를 불렀다. 병원문 앞을 나와 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렸고, 저 멀리 번호판으로 택시가 오는 것을 확인한 후, 기쁜 마음에 택시 가까이 다가갔다. 나를 본 택시기사는 운전석 문을 반쯤 열더니 "휠체어 못 실어요."라고 말하며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택시가 저 멀리 사라진 후, 함께 온 이웃집 언니와 나는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평소대로라면, 호출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다리가 다친 나의 상황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당연한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결과물인 "목적지"에 도착함에 생긴 변수. 그 결과,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늦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기에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무엇인가를 깨닫고 가라고, 무엇인가를 알고 가야 한다고 나한테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