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에서 하루 종일 미술 산책을 하는 방법
미국 젊은이들은 불금이 되면 ‘바 호핑 (bar hopping)’을 즐긴다. 말 그대로, 여러 바를 옮겨 다니며 술을 한잔씩 마시는 문화다. 그와 비슷하게, 뉴욕에서는 ‘갤러리 호핑 (gallery hopping)’을 경험할 수 있다. 칵테일 바 대신 갤러리를 옮겨 다니며, 술 대신 예술에 취하게 된다.
뉴욕의 첼시(Chelsea) 갤러리 거리는 갤러리 호핑 문화의 중심지다. 열 블록 정도의 거리 속에 300개가 넘는 갤러리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다. 한 갤러리를 나와 단 10초 정도의 걸음만 옮기면, 또 다른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 뉴욕의 소호(SoHo), 트리베카(Tribeca) 동네의 갤러리 거리도 마찬가지로,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전시가 끝없이 펼쳐진다.
뉴욕의 갤러리들은 메트로폴리탄(The Met), 구겐하임(Guggenheim), 모마(MoMA), 휘트니(Whitney Museum)를 포함한 대형 미술관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이곳은 한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갤러리 호핑을 하다 보면, 나처럼 거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익숙한 얼굴들, 그리고 에어팟을 낀 채 자신만의 예술 탐방에 빠져있는 사람도 눈에 띈다.
마치 대형 미술관의 야외 버전 같달까. 한 작가의 전시를 감상한 후 다른 화가의 전시로 이동할 때마다, 바깥공기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갤러리가 무료라는 사실.
소호, 첼시, 트리베카의 갤러리들은 전시와 동시에, 실제 작품 판매가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미술 시장이다. 무명작가부터 국제적인 작가까지, 크고 작은 작품들의 거대한 거래들이 오고 간다. 작품은 개인 컬렉터가 사갈 수도 있고, 때로는 미술관에서 구매하기도 한다.
어쩌면 오늘 스쳐간 한 점의 작품이 훗날 세계적인 명작이 될 수도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갤러리 거리에서는 교과서에 나왔던 유명한 고전 작품이 아닌,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전 작가들 또는 대학교를 갓 졸업한 무명작가들의 작품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갤러리 호핑에 하루를 투자하면 현대 미술의 트렌드를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다.
미술에 관심이 생긴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실리콘밸리에서 보낸 나에게, 이렇게 많은 갤러리가 모여있는 공간은 처음이었다. 처음 뉴욕의 갤러리 거리에 도착했을 땐, 솔직히 조금 막막했다. 나는 낯선 환경 속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때, 한 남성이 혼자 조용히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의 멋스러운 패션과 세상 '힙'한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고, 순간 갤러리의 작가가 아닐까 싶었다. 유리창 너머로 그를 잠시 지켜본 결과, 그는 나처럼 혼자 갤러리 호핑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도 용기가 생겼고, 그를 따라 조용히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입구에 앉아 있던 리셉셔니스트와 눈웃음을 나눈 뒤, 더 이상 주변 눈치를 보지 않은 채, 작품 세계로 홀로 빠져든다.
갤러리의 대부분 작품들은 아무런 정보 없이 전시가 되어있다. 가끔 입구에 있는 QR 코드로 작가 정보나 작품 제목을 확인할 수 있지만, 대형 미술관처럼 작품 옆 설명 또는 도슨트는 없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오로지 작품들과 나 자신뿐이다.
늘 새로운 도시에서 전시를 찾아다니던 나에겐, 이 공간은 그야말로 예술의 천국이었다.
뉴욕에 가게 된다면, 하루는 꼭 '갤러리 호핑'에 투자해 보길 권한다. 동네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미술관처럼 느껴지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20명, 아니 50명 넘는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이보다 더 풍요로운 미술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예술가의 꿈을 가진 회사원>
미술, 음악, 문화에 대한 저의 애정을 듬뿍 담은 매거진입니다.
뉴욕, 시카고, 한국에서 직접 방문한 예술 공간들의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Prologue | 예술가의 꿈을 가진 회사원 https://brunch.co.kr/@minjuminju/63
Episode 1 | 음악가의 도파민이 보인다는 것 https://brunch.co.kr/@minjuminju/64
Episode 2 | 헤엄치는 고래를 연주한 여덟 살 https://brunch.co.kr/@minjuminju/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