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혼자 살아본 스페인 이야기
어학연수를 결심하고 두 달 만에 나는 몸집보다 커다란 이민 가방을 들고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부모님과는 집 앞 리무진 버스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아빠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이민 가방을 리무진 트렁크에 실어주시고는 저걸 혼자 들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냐며 걱정을 하셨고 엄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취소하는 게 어떻냐며 마지막까지 만류를 하셨다.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리무진 창밖을 바라보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 괜스레 감상에 젖어 ‘안녕, 서울’이라고 되뇌다 이내 ‘저 짐을 끌고 혼자 알리칸테까지 어떻게 가나’ 하는 한숨과 함께 ‘가서 잘 살다 올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메우며 어릴 적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라는 감상 따위는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회사를 다니며 준비하기면 벅찰 것 같아서 유학원을 통해 어학원들을 알아보기로 했다. 갈 지역을 결정하고 학교 등록 및 비자 신청을 하는 데는 한 달 정도 소요된 셈이니 따지고 보면 생활을 위한 준비 기간은 한 달도 안 된 셈이다. 게다가 이별이 아쉽다며 친구들과 작별 인사 겸 환송회를 계속했던 터라 제대로 된 준비는 채 보름도 하지 못했다. 1년을 살러 가는 사람이 고작 보름 준비라니. 지금 생각해도 난 참 대책이 없었다. 준비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개에 고추장, 라면 2개, 속옷과 생리대와 같은 위생용품, 화장품 샘플 몇 개, 상비약, 노트북과 휴대폰, 충전기, 문구용품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밥이 되는 플라스틱 용기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왜 이민 가방은 내 몸보다 크고 무거운지 모르겠다. 공항에서 도난당할까 일부러 고른 화려한 형광 주황색 이민 가방과 속을 가득 채워 축 늘어진 배낭과 함께 리무진은 공항에 날 내려놓았다.
나는 어디 단기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미리 인터넷으로 면세품을 잔뜩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수하물로 부치면 짐이 될 테니 스페인에 가서 쓸 거라며 선글라스와 선크림도 잔뜩 장바구니에 담았고 가서 쓸 화장품도 면세품으로 구매했다. 그리곤 의기양양했다. 공항까지 갈 짐을 줄였다고 난 참 머리가 좋은 거 같다며 내 이민 가방의 무게가 현재 얼마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민 가방을 수화물 검색대에 올려놓고 그 무거운 가방을 올려놓은 나 자신이 대견해 씩 웃음을 짓고 있는데 카운터 직원이 수화물 추가로 요금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무게를 보니 40kg도 넘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운터 직원분은 친절하게도 유학을 가는 거냐 물어보시더니 기내 반입 캐리어에 나누어서 담으면 무게를 줄일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옮겨 담을 캐리어가 없다고 하니 주변 상점에서 캐리어를 구매하고 옮겨 담는 것이 더 저렴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역시 대한항공 국적기를 타길 잘했다며 감탄한다. 외국 공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절이다. 이런 친절과는 이제 멀어지겠지란 생각을 하며 다시 그 무거운 이민 가방을 끌고 캐리어를 구매하러 공항을 누볐다. 눈앞에 보이는 가방가게 아무 곳에나 들어가 제일 싼 기내용 캐리어를 찾았다. 직원 분이 진열되어 있던 파란색 천 캐리어를 가리키며 저게 제일 저렴하단다. 마침 재고가 하나밖에 안 남았다며. 망설일 필요 없이 당장 결제를 했다. 8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 캐리어는 내 평생 제일 잘한 쇼핑 품목 중 하나였다. 캐리어는 급하게 구입한 것 치고는 튼튼했으며 크기도 기내용 치고는 제법 컸다. 게다가 천 소재라 하드 캐리어보다 확장이 돼 짐을 더 많이 넣을 수 있었다.(북유럽 여행 시 공항에서 무게를 재보니 35kg까지 짐을 담았었다.) 이 캐리어는 이후 스페인 모든 여행에 함께 동반하였으며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캐리어를 받아 들고 공항 벤치에 가서 짐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기내 반입이 안 되는 액체류를 제외하고 무거워 보이는 것은 죄다 캐리어에 밀어 넣었다. 캐리어가 지퍼가 채워지지 않아 무릎으로 힘껏 누르고 낑낑대며 지퍼를 올렸다. 공항 저울을 찾아서 무게를 달아보니 수화물로 부칠 이민 가방은 27kg, 기내 반입 용 캐리어도 23kg이 나간다. 가져갔던 클렌징 티슈, 샴푸, 낡은 옷 등은 공항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터질 듯한 캐리어를 무릎으로 누른 채 지퍼의 입을 열어 물건을 조금 더 덜어 넣는다. 꼭 목 밑까지 음식을 밀어 넣으며 과식하는 내 모습 같다. 그렇게 세 번을 작업한 후 무게를 재니 이민 가방은 24kg. 캐리어는 26kg이다. 물건을 버린다고 버렸는데 무게의 합은 왜 똑같은지 미스터리하다, 더 이상은 무리겠다 싶다. 살은 2kg은 빠진 것 같은데.
체크인 카운터로 가서 다시 수화물을 올린다. 리턴 비행기 표가 1년 정도 후인 것을 보더니 또 다른 카운터 직원이 유학을 가냐고 묻는다. 어학연수에 간다고 대답하는 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대답이 자랑스러웠다. 4kg의 추가분은 지불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들어가라며 다시 한번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 대한항공 만세를 부르며 26kg의 캐리어와 몇 킬로그램 인지도 모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공항 검색대로 간다. 공항에서의 감성적인 인스타용 사진과 커피 한 잔은 잊은 지 오래다. 검색대를 통과하고 게이트를 확인하는데 출발이 30분도 안 남았다. 분명 나는 4시간도 전에 집에서 출발했는데 짐을 해체하느라 시간을 다 소요한 것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무작정 뛰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라스트 콜을 받으며 비행기에 몸을 겨우 실었다. 면세품은 찾지도 못하고 나는 그렇게 선글라스와 화장품, 선크림도 없이 태양의 나라 스페인으로 떠났다.
가족, 친구들과 안부전화는 잊은 지 오래고 비행기 인증샷, 한국을 떠나는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비행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그 큰 짐들을 들고 3박 정도 호스텔에서 묵으며 관광을 하고 후에 알리칸테에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을 계획했었다. 물론 시간이 없단 핑계로 비행기에서 관광 코스를 짜려했지만 그 계획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비행기나 기차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잠이 든다 해도 30분 남짓이 최대 시간이다. 그런데 스페인으로 가는 그 비행기에서는 12시간 내내 잠만 잤다. 12시간 후 나는 배낭을 멘 채 내 몸집만 한 형광 주황색 이민가방과 파란색 캐리어를 들고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맨몸으로 낯선 땅에 던져진 느낌이다. 이 나라에서 정말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이렇게 대책 없고 생각 없는 내가 이 먼 외국 땅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