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계절은 아마도 여름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저 멀리 남부지방은 여름이면 40도까지 올라간다던데. 거기에 비하면 알리칸테는 동쪽에 위치하기도 하고 바닷가를 인접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처음 도착한 이틀은 호기심에 그리고 내가 드디어 스페인에서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 관광객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변부터 광장까지 주요 관광지를 구경을 다녔다. ‘덥다더니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며 오기를 부리다 큰일이 날 뻔했다. 물도 없이 돌아다니다 오후 2시쯤 되니 탈수증이 온 것이다. 급히 마트 같은 곳을 찾아 헤매는데 잘 보이지 않고 멀리 보이는 해변 슈퍼마켓에 가보니 문을 닫았다. 해수욕장에도 사람이 별로 없다. 온 도시가 정지된 것 같다. 아이스크림가게도 문을 닫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겨우 돌아와 그대로 물 1.5리터 한 통을 거의 다 비운 채 뻗어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름철은(6월~8월)까지 너무 더워서 오후 2~4시에는 상점들이 다 문을 닫는다. 더위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가게 주인도 힘들기 때문이다. 일반 회사나 관공서도 마찬가지라서(닫는 시간은 조금씩 다른 것 같았다.) 실제로 외국인 거주증을 발급해주는 시청은 여름 기간 동안은 9시부터 11시까지만 운영을 했다. 처음엔 스페인 사람들에게 흔히들 갖는 편견이 나도 있었다. 일하기를 싫어해 점심 식사 후 『시에스타(Siesta)』라는 낮잠을 즐긴다고. 하지만 살다 보니 시에스타는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시간에 적당히 휴식을 취해야지 해가 떨어지면 다시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더위였다. 역시 왜 스페인을 여름의 나라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옷차림이 많이 짧았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건 남자건 짧은 팬츠(정말로 짧았다)에 민소매 차림이었다. 소매가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였고 그 외엔 모두 아주 짧은 바지를 입었다. 남자들의 쇼트 팬츠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자주 민망해지곤 했다. 민소매 티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트램이랑 버스를 탄 사람도 많았다. 트램을 타면 이곳이 바닷가인지 대중교통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내 옷차림도 많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위 앞에서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옷을 고를 때도 얼마나 시원한지가 기준이 되었다. 더위를 이겨낼 옷을 찾다 보니 내 옷차림 역시 살이 노출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스페인의 태양은 정말 생각했던 것만큼 강렬했다. 한낮에는 가림막 없이 그대로 내리꽂는 듯한 강렬한 직사광선이 살갗을 아프게 찔렀다. 길가를 걸을 때면 태닝 기계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원체 잘 타는 까만 피부였다. 그런데 태양의 나라라 불리는 스페인에 선글라스도 선크림도 없이 왔다. 종류가 너무 많고 사기 어렵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곳에서 파는 선크림을 살 생각도 안 했다. 시간이 갈수록 피부는 까맣게 그을려 갔다. 집주인은 매달 집세를 받을 때마다 나보고 볼 때마다 더 까매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러시아 친구가 내게 한국 사람도 이렇게 원래 까맣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가끔 스페인 다른 지방에 여행을 가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도 사람들은 내가 한국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근처에 앉아 있으면 한국인인지 모르고 한국말로 스페인에 대해,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흉을 보기도 했다.
2016년 그해 여름은 한국 역시 무더위로 고생하던 해였다. 한국 친구들과 영상 통화를 하면 모두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민소매 차림으로 통화를 하던 친구는 올해 한국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더위를 피해서 다행이라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더위와는 다르게 습도가 높지 않아 건물 안에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덥지는 않았다. 햇볕이 강렬하고 따가웠지만 습하지 않아 숨 막히는 더위는 아니었다. 8개월 동안 에어컨 없는 집에서 생활했지만 크게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다. 나중에 수업시간에 들은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스페인의 집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벽을 바람이 잘 통하게 짓기 때문에 더위에는 강하지만 추위에 약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의 여름에도 차츰 익숙해져 갔다. 너무 더운 날이면 그냥 스페인을 제대로 느끼는 거라 위안했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도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훈장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적어도 여름 동안은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