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는 어렵다

by 이수현



이제 제법 스페인어 알아듣는 게 편해졌다. 한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6개월쯤 되고 이제 이곳에서 사는 일상이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창하게 TV에 나오는 모든 말들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아니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 정도는 된 것이다.


마트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집주인과 이야기를 하는 데 불편함은 사라졌지만 수업은 점점 더 따라가기 어려워졌다. 스페인어는 비교적 입문하기 쉬운 외국어이다. 알파벳은 이미 모두 알고 있고 하나의 글자가 한 개의 발음만 있어 30분 정도만 배우면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해서 영어와 비슷한 단어도 많고 문법도 비슷한 구조라 초급 단계에서는 그리 스트레스받지 않고 학습이 가능했다. 물론 불규칙한 동사변화를 모두 외워야 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불규칙한 동사 변화들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다.



문제는 중급반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수업을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겨우 기초 문법 수준만 공부하고 간 데다가 짐이 무거울까 봐 기본적인 한국어 해설 문법 교재도 챙겨가지 않았기에 원어로 설명해 주는 문법 수업은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기본 개념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데 시험은커녕 책에 있는 예시 문제조차 정답을 맞힐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턱걸이로 월말 시험을 통과했다. 다른 한국, 일본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문법 과정은 마스터하고 왔기 때문에 고급반으로 올라갈수록 강세를 보인데 비해 나는 점점 더 수업 시간에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초급반에서는 미국이나 영어권 나라의 학생들이 수업을 이끌어갔다. 같은 라틴어 계열인 데다 남미 출신의 이민자들 덕에 이제 미국에서 스페인어는 익숙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미국 친구들은 틀려도 자신감 있게 말한다. 말하다 막히면 영어를 섞어서 말해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업을 이끈다. 발음을 지적을 받아도 별로 고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울 때 어려워하던 ‘r’ 발음이 스페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아 영미권 학생들에게는 ‘r’ 발음이 항상 문제였다. 스페인에서는 ‘rr’에서만 혀를 굴리고 보통 한 개 있는 ‘r’은 한국어처럼 ‘ㄹ’로 발음한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은 모든 ‘r’을 미국식으로 발음해서 항상 선생님들의 지적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중 하나가 ‘Me gustaria ~’가 있다. 직역하면 ‘~하면 좋을 텐데’라고 번역되는데 일상생활에서 정말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이 문장에는 ‘me’와 ‘gustaria’라는 두 단어 모두 발음의 고난이 있었다. me라는 표현이 영어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어기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대부분 ‘메 (쉬고) 구스따리(~)아’라고 발음했다. 그렇게 발음할 때마다 선생님의 지적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상급반에 가서도 그 발음을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중급반으로 올라가니 학생별로 수준 차이는 더 심해졌다. 주로 문법을 설명하고 책에 있는 예시를 푸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동양권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문법의 중요성이 이때부터 발휘 된 것이다.

월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유급하는 학생들도 늘어갔다. 알리칸테 어학원은 한 달 단위로 수업을 등록할 수 있고 월말에 시험을 봐서 통과하지 못하면 진급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수업을 듣는 반 친구들과는 이미 정이 많이 들었고 앞 뒷반에 있던 학생들도 유급으로 뒤섞여 아는 얼굴이 많아졌다. 일본, 중국, 러시아, 남아공, 프랑스, 이탈리아 등 학교에는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반이 올라갈수록 모두가 스페인어를 어려워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언어가 거의 비슷해 초반에는 다들 쉽게 진도를 따라갔다. 하지만 스페인어 ‘접속법’을 배우던 중 이탈리아 친구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된다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었다.



‘접속법’은 스페인어 문법의 가장 고난도의 개념으로 이 부분만 다룬 문법책이 따로 있을 정도로 모두가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한국어에도 없고 영어에도 없는 문법이기에 무슨 개념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데 원어민이 원어로 설명해주는 문법 강의를 듣고 이해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보통 간접적으로 내 의견이나 감정, 조언, 충고, 희망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미국인이 한국어 조사의 사용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의 설명으로 공부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스페인어의 이 ‘간접’은 정말 ‘느낌’이라 화자의 의도에 따라 문장의 의미나 사용이 전혀 달라져 오랜 시간 스페인어를 배우거나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친숙해지기 힘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중요시하는 것이 언어에도 드러나는 것 같았다. 발화 시 청자보다 화자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 기분이 중요한 것이 꼭 스페인 사람들을 닮아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지막 수업을 듣는 날까지 나는 접속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스페인을 떠나왔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결론은 많이 듣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원어민과 실제로 대화할 일은 많지 않았다.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스페인어는 고사하고 ‘대화’라는 것을 할 사람이 없었다. 룸메이트들과는 전혀 교류할 일 없이 서로 각자 생활을 존중하며 지냈고 당시에는 학교에서 딱히 어학연수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도 않았다. 마트 직원이나 음식점 웨이터가 내가 이야기하는 스페인 사람의 전부였다.


수업시간을 열심히 활용하기로 했다. 외국에 와서 원어민에게 직접 수업을 듣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거의 몇 년간 직장에서 번 돈을 수업료로 지불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손을 들고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다시 한번 설명해달라고. 원래 한국에서는 초, 중, 고, 대학교 모두 선생님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학교를 다녔다. 소심한 성격 탓에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고 수업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집에 가서 혼자 찾아보는 쪽이었다. 목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도 같다.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로사리아가 되자 이제껏 하지 않던 것들이 가능했다. 일단 나는 모르는 것을 다시 찾아볼 책이 없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뭐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나이 많은 내가 제일 못 따라간다는 것은 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다. 민폐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설명을 다시 듣는 것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 번이 어렵지 그 뒤엔 자연스러웠다. 선생님의 모든 질문에 꼭 대답하려고 했고 선생님들과 수업시간에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은 너그러웠다. 다른 스페인 사람들과는 달리 느린 우리의 말을 기다려줬고 틀린 부분은 고쳐줬다. 그래서 틀려도 말했다. 표현 하나를 배우고 활용해보라고 하면 하나는 꼭 말해보려 했다. 스페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선생님들에게 질문했다.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 스페인에 대해 알게 된 지식 대부분은 그렇게 선생님들에게 질문한 내용들이었다. “왜 스페인 집들은 노란색이에요?”, “왜 스페인 상점들은 주말에 문을 닫아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자기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매일 일기를 써서 선생님에게 검토를 부탁한 적도 있다. 8월에 들었던 회화수업은 수강생이 나를 포함해 3명이었고 모두 여자였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친절한 선생님 크리스티나는 먼저 일기를 써오면 검토해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나는 실제로 매일 일기를 써갔다. 초창기라 아는 단어가 적어 매일 비슷한 표현으로 적어가는 일기였지만 크리스티나는 지겨워하지 않고 꼼꼼히 봐줬고 자주 쓰이는 멘트를 첨삭해주기도 했다.

누구 하고나 말하기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 덕분에 버스나 트램 안에서도 스페인어 실력이 늘었다. 수업을 마치고 버스에서 우리끼리 오늘 배운 ‘뺨’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 갸우뚱거리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메히야(mejilla)’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틀린 문법으로 말도 안 되게 수다를 떨고 있으면 앞에 있던 할머니가 틀렸다며 문장을 고쳐주었고 그것을 마중물로 트램에서 내릴 때까지 처음 보는 할머니와 수다를 떨다 내렸다. “어디에서 왔니?”, “스페인어는 왜 배우니” 두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하면 그 이후로는 내가 입을 뗄 여유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스페인의 좋은 점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음식도 추천해주기도 하며 본인의 가족과 사는 곳도 이야기해줬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옆자리 다른 승객들도 대화에 끼어든다. 파에야는 거기보다 어디가 더 맛있으며 그곳에 가면 무엇을 꼭 시켜 먹어야 한다고 한 마디씩 거들다 보면 나중에는 동시에 4~5명이서 대화를 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듣는 이야기나 단어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몇 차례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나도 모르는 옆자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익숙해졌다.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택시를 탈 때면 택시기사에게 먼저 이것저것 질문을 건넸다. 스페인 사람들은 일단 말을 먼저 걸면 그 뒤로는 더 이상 질문이 필요 없다. 끊임없이 말은 이어진다. ‘택시를 타고 가다 저기 저 건물은 뭐예요?’ 한마디만 물으면 저건 원형경기장인데 언제 생겨서 주말이면 투우 경기가 열리고 표는 어떻게 사는지까지 이야기해준다. 그러다 자기가 10년 전에 갔던 중국 여행 이야기도 하고 스페인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 개그를 좋아했다.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이 많지 않아 매우 짧게 말했는데도 하나같이 나와 이야기하면 재밌어했다. 내가 구사하는 개그는 아주 단순했는데 외국인이 내 말에 재밌어하니 기분이 좋아 부족한 실력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같은 반 한국인 중에 메르세데스라는 스페인어 이름을 쓰는 친구가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스페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 이름이다. 동시에 유명한 차 브랜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gris’를 미들 네임으로 쓰는 것이 어떠냐고 추천해줬다. 그리스(‘gris’)는 스페인어로 회색이란 뜻이다. 메르세데스(차)는 회색이 예쁘니 rojo(빨간색)이나 negro(검은색) 말고 그리스를 미들 네임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한참 스페인어로 떠들고 있으니 트램 맞은편에 앉은 스페인 학생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우리 쪽을 힐끗거리다 스페인 사람들도 회색 차를 더 좋아한다며 한마디 거든다.

내 스페인어 원어민 선생님들은 그렇게 길거리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책을 보며 공부하던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실력이 쑥 늘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되지도 않는 ,당당히 말하는 외향형 인간이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스페인어를 쓰는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걸고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을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곳에 살았던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아직도 여전히 스페인어는 어렵지만 아니 5년이 지난 지금은 더 어렵지만 스페인어를 쓸 때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말하던 사교적인 성격의 그 시절의 또 다른 내가 나타난다, 그러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스페인에서 발견한 또 한 가지는 내 안에 있던 외향적인 나였다.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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