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쇼핑 그리고 블랙프라이데이

by 이수현


살을 뚫을 듯한 햇빛의 여름이 지나고 잠깐 가을인가 싶더니 11월이 되었다. 스페인의 11월은 가을이라기엔 조금 쌀쌀하고 겨울이라기엔 옷차림이 두껍지 않은 한국의 서늘한 가을 날씨였다.


원체가 짐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국에서 겨울옷은 한 벌도 챙겨 오지 않았다. 여름 나라인 스페인에서 겨울옷은 별로 필요치 않아 보였고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니 겨울옷은 가서 사자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옷을 넣을 공간에 몇 개 더 챙겼던 고추장은 긴 비행에 터져버려 먹지도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여름 내 교실 에어컨 바람을 막기 위해 산 ZARA 니트 카디건으로는 추위를 버틸 수 없던 중에 학교 선생님이 곧 블랙 프라이데이니 기다려보라며 팁을 준다. 한국에서도 잘 이용하지 않았던 블랙 프라이데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블랙 프라이데이는 11월의 넷째 주 목요일인 추수감사절 다음날로 연중 가장 큰 규모의 쇼핑이 행해지는 날이다. 스페인 역시 미국과 맞춰서 보통 11월 마지막 주에 시작하는데 백화점, 쇼핑몰, 옷 가게 할 것 없이 모든 상품이 대규모 세일을 한다. 그 세일의 규모가 엄청나서 60% 할인은 기본이고 8~90%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 세일 첫날은 ZARA나 전자제품 상가에 길게 줄을 서고 그다음 날 가보면 좋은 물건은 다 빠지고 없었다.




내가 알리칸테 청담동이라고 불렀던 마소나베(Masonnave) 거리에는 Zara, Pull&bear, 마시모두띠(Massimo Dutti), 우먼스시크릿(Women's Secret), 데시구알(Desigual) 매장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산책 나오기 좋아 보통 저녁을 먹고 산책할 때 바닷가가 지겨워지면 매장에 들러 필요도 없는 옷을 입어보곤 했다. 하굣길에 그 근처 정류장에 내려 한참을 옷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간혹 마음에 들었던 옷이 세일을 하면 바로 구매를 했다. 본격적으로 쇼핑을 하고 싶으면 버스나 트램을 타고 큰 쇼핑센터에 갔다. 한국인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각자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루세로스(Luceros) 정거장에서 만나 24번 버스를 타면 쇼핑센터인 그란비아(Granvia)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매장들(ZARA, 마시모두띠, 데시구알 등)이 큰 규모로 위치하고 있었고 알 캄포(Al Campo)라고 하는 스페인식 까르푸 같은 대형 매장이 있었다. 배추 비슷한 야채와 대파를 살 수 있었고 겨우내 내 몸과 한 몸 같았던 전기장판도 그곳에서 샀다. 알리칸테 도심에는 없던 H&M과 Primark 매장도 있었다. 나는 그중 특히 Primark을 애용했는데 Primark은 유럽에 좀 가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영국에서 시작된 브랜드로 우리나라로 치면 유니클로 같은 캐주얼 브랜드였다. 속옷과 수영복, 잠옷, 니트, 카디건,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옷가지들과 신발과 액세서리, 스타킹까지 의류 품목들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디자인에 품질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산 검은색 목 티를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풀도 없이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수업을 같이 듣는 한국인 친구들과 금요일 수업이 끝난 후 그란비아에 가보기로 했다. 용돈을 받아서 쓰는 다른 어린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을 때는 나 역시 돈 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교통비 할인도 받지 못하고(알리칸테에는 carnet joven)이라는 청소년증이 있으면 교통비를 할인해서 구매할 수 있다.) 관광지 할인도 받지 못하니 옷이라도 저렴하게 사고 싶다는 알 수 없는 보상심리가 들었다.

옷 가게를 돌기로 하고 Pull&Bear와 Primark을 서성이며 옷걸이를 훑어보는데 주위에 같이 수업을 듣는 일본인 친구들이 보인다. 서로 반가워 아는 체를 하고 무엇을 샀냐며 정보를 공유한다. 스타킹을 저렴하게 샀다는 일본 친구의 말에 나도 장바구니에 몇 개 넣었다. H&M에 가니 옆 반 덴마크 친구가 열심히 점퍼를 고르고 있다. 또 반갑게 인사를 한 후 필요했던 옷가지들의 할인율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ZARA에 갔다. 앞서 말했던 브랜드들보다는 점잖은 옷들이 많아 내 나이 대에 어울리는 옷들이 많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우리에게 블랙프라이데이 정보를 알려줬던 회화 선생님 크리스티나(Cristina)가 옷을 한 무더기 들고 카운터에 줄을 서있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멋쩍게 웃는다. 보통 20유로가 안 되는 가격으로 절반도 넘게 할인되어 판매하고 있으니 선생님이건 학생이건 그때 쇼핑을 하지 않으면 바보였다. 그래서 그 기간 쇼핑몰에 가면 모든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저가 브랜드에서는 원피스도 6~7 유로면 구매가 가능하고 심지어 패딩을 10유로 대에 살 수 있었다. 저가 브랜드뿐만 아니라 마시모 두띠와 자라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내내 점찍어 두었던 15만 원 정도 하던 가죽 구두가 5만 원에 팔리고 있다. 세일하기 전에 샀으면 후회할 뻔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 가격이 내려갔다. 어제 10유로 하던 원피스가 일주일 후에 가니 7유로다. 한 주 정도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11월 내내 세일을 한단다.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이라고 가서 보니 팔리지 않는 재고물품들 몇 개만 할인하는 한국과 달리 통도 크다. 엊그제 신상이라고 본 카디건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30프로나 할인을 한다. 매일매일 새로운 품목들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매일 모든 매장에 도장을 찍고 다녔다.



스페인 사람들도 그 시기에 소비를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가격이 저렴하기도 하고 연말도 가까워 연말 선물을 미리 사기도 제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스페인 사람들은 옷이나 유행에 크게 민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대도시가 아니다 보니 그렇겠지만 옷차림새나 외모에 관대한 편이었다. 월급만큼 필요한 만큼의 옷만 사고 필요 이상으로 사지 않는다.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몇 벌의 옷을 매번 돌려 입고 유행이 지난 옷들도 아무렇지 않게 입는다. 적어도 나처럼 옷에 어울리는 신발을 하나 사겠다고 매일 매장에 도장을 찍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출근길에 회사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버스를 타면 본인 이름표를 적은 청소 유니폼을 입은 사람도 많이 보였고 휴대폰 판매 브랜드 orange의 사원은 본인 명찰을 단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출근했다. 그래서 특별히 필요 없는 옷을 세일한다고 사기보다는 필요한 물건을 세일 기간에 저렴하게 사는 듯했다. 소박하지만 충분한 삶이었다.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나는 단지 할인이란 이유로 부츠를 구매했지만 이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갔다. 언제인가 선생님 이사벨(Isabel)이 어학원에서 주말반을 만들려고 하지만 수업을 하겠다는 선생님이 없어 강좌가 개설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시급을 1.5배로 주겠다는 제안에도 아무도 지원자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과 한국인 친구들은 눈이 동그래져 대체 왜 그런 기회를 잡지 않냐고 물었지만 이사벨은 돈을 더 준다고 해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주말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러한 제안이 온다면 나는 돈을 받기도 전에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하는 부츠를 신용카드로 긁고 날마다 후회하며 주말 출근을 했을 것이다.



세일은 12월까지 이어졌다. 12월이 되니 이제 크리스마스 주간이라고 새로운 이벤트들이 많다. 주말 오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 산책 겸 백화점에 갔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 뭔가 하고 봤더니 플레이스테이션을 세일한단다. 줄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30~ 40대 남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보인다. 붙여놓은 전단지를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하세요.’라고 되어 있다. 파격적인 할인에 잠깐 줄을 서야 하나 고민스럽다. 지금도 11월이 되면 나는 스페인에 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오로지 블랙 프라이데이만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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