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김치도 아니고 떡볶이나 라면이 아닌 바로 ‘아이스 라떼’였다. 한국에서는 5년 차 직장인답게 매일 아침 아이스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커피가 없이 시작한 하루는 깨어서 시작하는 하루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나는 마치 좀비 같았다. 아이스 라떼라는 커피를 수혈해주면 그제야 깨어나는 직장인 좀비 말이다. 그렇게 마시던 커피는 버릇이 되어 스페인에 와서도 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이스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보통 간단한 샌드위치나 커피, 음료, 주류 등을 파는 카페테리아(cafeteria)나 바(bar)에서 커피를 주문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카페는 알리칸테에서 찾을 수 없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종류도 단순했다. 에스프레소를 일컫는 ‘카페 솔로(Cafe solo)’, 보통의 카페라떼인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 카페 콘 레체보다 우유가 좀 덜 들어간 ‘코르타도(cortado)’ 등을 주문할 수 있었다. 좀 더 많은 종류가 있는 곳에서는 ‘카페 봉봉(cafe bonbon)’이라고 매우 단 연유 시럽을 넣은 커피와 우리가 자주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은 드물었고 메뉴에 아이스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만 마시던 당시의 나에게 스페인의 더위에서 뜨거운 커피는 견딜 수 없는 존재였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인 산티아고(santiago)에게 고충을 토로하니 콘 이엘로(con hielo)라고 말하면 아이스를 준다고 했다. 다음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카페 콘 레체 콘 이엘로’라고 주문을 했고 매일 주던 뜨거운 카페라떼에 큰 얼음 한 개를 넣어준다. 뜨거운 커피에서 그 얼음은 자취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한 모금 마셔보니 커피는 얼음을 넣은 것이 무색하게 뜨거웠다. 이번엔 집 앞 바에서 카페 콘 레체 콘 이엘로를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예 뜨거운 카페라테에 얼음을 종이컵에 담아 준다. 직접 넣어야 하나 보다.
원두 맛을 잘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스페인 원두 자체가 맛있는 원두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성한 거품이 가득한 라떼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우유 거품기를 사용하는 것 같기는 한데 한국에서 보던 풍성한 거품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자판기 커피 같은 그런 라떼를 먹으려니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알았다. 나의 소울푸드이자 영혼의 양식은 김치도, 불고기도 , 떡볶이도, 라면도 아닌 바로 맛있는 아이스 라떼였다.
알리칸테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인구가 33만이나 되는 대도시였지만 커피 프랜차이즈는 코르테 잉글레스(Corte ingles) 백화점 안에 있는 스타벅스가 다였다. 그곳은 알리칸테 유일의 커피 프랜차이즈였다. 가격이 비싼 탓에 현지인들은 자주 가지 않는 듯했고 매장에는 항상 외국인 관광객이나 유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앉아있었다.
스페인에서 보통 커피 한잔 가격이 1유로나 1.5유로인데 반해 스타벅스 커피는 3~5유로 정도 했으니 나에게도 부담되기는 마찬가지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방문이 가능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나는 스타벅스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해외여행을 가서 길을 헤매다 혹은 말이 안 통해 곤란한 일을 겪다 스타벅스 간판과 익숙한 그 인테리어를 발견하면 어찌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익숙한 인테리어와 익숙한 커피 향, 늘 먹던 메뉴와 균일화된 맛까지 스타벅스에 들어서면 낯선 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알리칸테에서도 스타벅스는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스타벅스에서는 한국에서 먹던 커피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그 맛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난 후 한 달 동안 열심히 한 나에게 보상을 주고 싶을 때,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 나는 스타벅스로 가서 나에게 3유로의 아이스 라테를 선물했다. 그러면 서울 어딘가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페인에서도 잠을 깨워주는 데는 역시 자판기 커피가 최고였다. 우리나라 대학처럼 커피 자판기가 강의실마다 설치되어 있어 수업 중간에 뽑아 마실 수 있었다. 한국 자판기와 비슷한 크기의 기계에 종류별로 버튼이 있어 먹고 싶은 메뉴를 누르면 커피가 나온다. 한잔에 2.5유로 정도 했는데 동전을 넣고 먹고 싶은 커피를 선택하면 딸그락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일회용 컵이 떨어지고 그 위에 커피가루와 뜨거운 물을 부어 금방 커피 한잔을 만들어냈다. 한국 자판기 커피와 차이점이라면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저을 수 있는 나무 스푼이 같이 나오고 설탕량을 버튼으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설탕이 없는 자판기 커피는 무언가 이상해 한 번도 설탕 조절 버튼을 누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뽑아 든 커피는 수업 중간에 몰려온 잠을 멀리 내쫓을 만큼 달콤했고 진했으며 중독적이었다. 조금 더 달고 연유가 들어간 듯한 부드러운 진한 맛이 감돌아 미묘하게 한국 자판기 커피와는 다른 맛이었지만 중독성 있는 맛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매일 나는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동전이 없어 커피를 마시지 못할까 등굣길에는 항상 잔돈을 준비하곤 했다. 커피를 뽑아 들고 강의실 복도에 서있노라면 다시 대학생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과제와 시험의 부담을 친구들과 토로하다가 시험이 끝나면 더 굿버거(the good burger)에 가서 햄버거에 생맥을 하자고 약속하고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수업이 시작된 교실로 들어가는 게 나름의 행복이었다. 한국에서 피로를 쫒으려 마시던 믹스커피와는 달랐다. 한국에서는 너무 달아서 믹스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체력이 다 소진되어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날 한잔 타서 먹으면 진한 단맛에 순간적으로 눈이 확 떠졌다. 하지만 그렇게 마시는 커피는 그 영향력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오히려 더 피곤한 상태로 탈진해서 침대 위에 뻗게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대학교에서 마시던 자판기 커피는 집에 돌아와도 탈진할 일이 없었다. 스페인의 모든 커피가 한국보다 맛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학교에서 먹던 자판기 커피는 한국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것이 단지 커피의 맛이었는지 아니면 커피 뒤에 따라온 부담감이나 내일의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스페인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갈 때면 근처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있는지 꼭 찾아봤다. 관광지는 보통 온갖 종류에 커피 프랜차이즈가 즐비해 있어 매일 아침 익숙하고 표준화된 맛의 커피를 즐겼다. 그런 곳에서는 보통 알리칸테에서도 갈 수 있는 스타벅스 대신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국에서 시작된 프랜차이즈 ‘코스타 커피’에 가서 라떼나 카푸치노와 함께 에그타르트 같은 빵을 시켜 아침으로 먹었다. 그렇게 카페에 앉아 커피와 함께 아침햇살을 맞고 있노라면 여행객이 된 설렘을 만끽할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은 해외 여행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알리칸테에는 없었다. 알리칸테 주민이었던 나는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갈 때면 다른 나라로 여행을 온 것처럼 카페에 앉아 여행객의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어느 곳에 머물든지 있던 자리를 벗어나 다른 새로운 곳에 가보는 여행에 대한 열망이 있는 듯하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고작 8개월을 살면서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아침 커피에 설렘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스타벅스나 여행지에서 잠깐씩 마시는 맛있는 커피는 내 커피를 향한 갈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네스프레소 커피머신을 집에 들이기로 했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맞아 백화점에서 파격 할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때까지 캡슐커피는 한국에서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50유로에 파는 저 캡슐 커피 머신을 사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게다가 20유로 분량의 커피 캡슐을 끼워 준다는 말에 바로 카드를 긁었다. 이제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서 머신이 무거운지도 모르고 들고 집에까지 달려왔다. 종업원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AS 받을 수 있다며 내게 계약서를 챙겨줬고 제법 이것저것 기계 작동법이나 네스프레소 매장 위치 등을 스페인어로 물어보고 구매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박스 포장을 풀고 책상에 올려놓으니 방안이 꽉 찬 것 같다. 당장 캡슐을 넣고 커피를 한 잔 내려 본다. 방안 가득 커피 향이 풍기는 것이 잘 샀다 싶다. 다른 룸메이트 친구들은 아침마다 모카포트를 사용해 커피를 추출해 마셨다. 신기하기도 하고 아침에 주방에서 풍기는 커피 향에 기분이 좋아져 나도 한 번 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포트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편한 캡슐 머신이 내게도 생긴 것이다. 이제 방안에서도 기분 좋아지는 커피 향을 맡을 수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머신에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린 후 씻으러 갔다. 머리를 말리고 내린 커피를 마시면 아직 남아있던 잠의 여파가 확 달아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커피는 그곳에서도 지금 한국에서도 여전히 나의 영혼의 양식이다. 커피 한 잔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고향 같은 안정감을 느낀다. 스페인에서 한국에서 먹던 맛이 떠올라 한국을 그립게 한 것도 커피였고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위로해 준 것도 바로 커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