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기 위해 펼치는 그림책
영화나 책을 볼 때 결말부터 찾아본다.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인한 감정적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결말과 줄거리를 알고 나면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점집에 찾아가거나 타로카드를 보는 것과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월초에는 별자리운세를 꼼꼼히 읽는다)
나에겐 일상 그 자체가 불안한 사건으로 점철된 공포영화라서 굳이 그런 영화를 찾아서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카모메 식당> 같은 엄선된 힐링영화만 보고 소설책 대신 그림책을 읽는 소심자는 역시 나뿐인 걸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나와 똑 닮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서 그림책의 맨 뒷장부터 거꾸로 살펴나가더니 다시 첫 페이지를 활짝 펼친 다음 내 앞에 내밀며 읽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내 딸도 나와 같이 ‘불확실성 기피 욕구’를 가진 소심자로 판명되었다.
단 한 치 앞도 계획하거나 예측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남편과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건 사실이다.
늘 예측과 계획에서 빗나가는 그의 행보는 나의 일상을 반전 가득한 스릴러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하루의 스케줄을 작성해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도 해봤지만 어쩐지 그는 매번 자신이 작성한 스케줄에 없는 일들을 열심히 수행했기에 체념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라고 해두자.
루틴에 집착하며 숨 막히게 흘러가는 나의 하루에 빈칸과 반전의 즐거움을(때론 고통을) 주는 건 역시 남편 덕분이니까.
인물과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저 인간은 대체 왜 저러는 건지(주로 남편),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주로 육아), 가면을 쓴 살인마에게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주로 아침에), 왜 늘 통장 잔고가 바닥인 건지(매일매일) 모르겠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멈춰야 할 때다.
멈춰서 잰 브렛(Jan Brett)의 그림책을 들여다보듯 내 인생의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둘러싼 전후곡절을 찬찬히 살펴본다.
젠 브렛(Jan Brett)의 그림책에는 페이지마다 시각적 복선,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관한 힌트, 중심이야기 주변부에서 펼쳐지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반전과 스릴을 즐기는 이들에겐 스포일러로 가득한 악몽 같은 상황이겠지만, 나와 같이 불확실성 기피욕구를 가진 독자들에게 ‘스포’는 통제감과 안정감을 준다.
서로 다른 장면과 입장, 시점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결말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형태는 그림책뿐만 아니라 내 주변과 타인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잠시 멈추고 오랫동안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녀의 그림책을 편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
가장 아끼는 젠 브렛(Jan Brett)의 그림책은 툰드라 지역에 사는 커다란 사향소의 이야기를 담은 <코지, Cozy>이다.
책을 펼치면 단번에 북극의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툰드라에 도착하기 때문이고, 우람한 사향소를 귀엽고 포근하다고 여기게 해 준 책이기 때문이다.
코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향소는 무리와 떨어져 홀로 눈보라를 견디고 있었다.
이름이 아늑함과 포근함을 상징하는 ‘코지’인 이유는 그의 몸을 둘러싼 부드럽고 두툼한 털 때문이다.
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는 툰드라의 눈폭풍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다양한 동물들이 존재한다.
코지는 못 보겠지만, 독자인 나는 작가가 그림책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배치해 둔 주변부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서 나그네쥐 가족들이 코지의 발밑에 숨을 동안, 이야기 주변부에서는 추위에 떨고 있는 눈신토끼의 모습을 작게 보여주는 식이다.
그러면 다음 페이지에 눈신토끼는 코지가 있는 중심이야기로 성큼 들어와 자기 좀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럴 동안 주변부에서는 바람에 휩쓸리는 흰 올빼미가 빼꼼 보인다.
그렇게 다음에 일어날 일들은 예측 가능하고 독자는 기대감을 품고 가볍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예고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나름의 괴로움을 견디고 있는 이 순간, 내 주변부에서 다른 사람들이 견디고 있을 눈폭풍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야기의 중심에서 나만 생각하고 있는 ‘나’는 못 보겠지만, 멀리서는 보이는 장면들.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서 있는 주변인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 조금은 가능해진다.
그를 이야기 중심부에 데려다 놓고, 그가 견디고 있을 눈폭풍을 헤아리며,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필요하다.
험악해 보이는 사향소가 사실은 자신의 보드랍고 따뜻한 털 속에 수많은 작은 동물들을 보듬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을 중심이야기에 데려다 놓고 찬찬히 살펴본다.
할머니처럼 해가 지면 바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루틴 강박을 가진 아내를 둔 그의 마음을.
생활 계획표보다는 그때그때 열정이 불타오르는 일을 해야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치를.
우리가 미국에 이민 온 지 3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고 말하는 차갑고 무심한 아내의 말에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그는, 나와 딸이 아늑하게 지낼 수 있도록 눈폭풍을 막아주는 든든한 사향소와 같은 존재다.
남편과 코지의 공통점을 알고 나니 이제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부부이자 가족인 우리의 다름은 서로에게 이해받는 것이 아니라 수용받아야 하는 것일 테다.
멈추면, 비로소 내 옆의 수많은 코지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4,400만 부 이상 판매된 젠 브렛의 그림책들은 전부 아름답고 대체로 포근하다.
그녀는 여러 나라를 여행 다니며 그 지역의 전통문화, 의복, 자연, 건축 등을 정교하게 그림과 이야기로 녹여내 그림책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기에 노르웨이의 눈 덮인 산, 아프리카의 정글, 북극의 이글루, 우크라이나의 작은 산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그녀의 그림책을 펼쳐보길.
<젠 브렛(Jan Brett) 그림책들>
<Cozy>
<The Mitten>
<The Three Snow Bears>
<The hat>
<The Snowy Nap>
<The Wild Christmas Reindeer>
<Gingerbread Baby>
<Mossy>
<The Easter Egg>
<Comet's Nine L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