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 스토리타임의 비밀
사서가 그림책을 읽어준다는 미국 도서관의 스토리타임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도란도란 둘러앉은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서의 나직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일지! 그러나 도서관에 도착해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태어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혼자 앉지도 못하는 아기들과 쪽쪽이를 물고 도서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기들도 보였기 때문이다. 신생아는 유모차에, 큰 아이는 무릎에 앉히고서 두 명을 혼자 돌보는 엄마도 있었다. 끊임없이 칭얼대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들도 도서관에 출입이 가능하며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니. 그것은 타당했지만 나에겐 새로운 개념이었다. 한국의 도서관들은 대체로 어린이열람실의 독서실화를 꿈꾸는 듯하였기에 아이와의 출입이 쉽지 않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목소리와 감정을 온전히 조절하지 못하고, 혼자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유아들은 그곳에서 결코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스토리타임의 시작은 다소 어수선해 보였다. 이곳에서 바른 자세란 곧 그림책을 듣기에 편안한 자세를 의미하는 듯했다. 보호자의 무릎에 앉은 아이도 있었고 바닥에 엎드려 턱을 괸 아이도 있었으며(이건 내 아이다), 사서의 어깨에 기대어 앉은 아이도 있었다. 사서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골라온 책을 소개하며 그림이 앞을 향하도록 들고서 글자를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거침없이 질문하고 끼어들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발언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그림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며 자리를 이탈해 그림책에 얼굴을 들이미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주의를 주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사서는 개의치 않고 아이들의 발언에 적절한 호응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그림책에 집중할만한 질문을 던지며 끊기는 이야기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나갔다. 우는 아기의 보호자는 얼른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두 권의 그림책을 읽은 후 아이들의 집중력이 서서히 증발할 때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로리 버크너밴드(The Laurie Berkner Band)의 The Goldfish (Let’s go swimming) 노래가 흘러나왔다. (프리스쿨, 도서관, 어린이행사에서 이 노래와 율동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 아기상어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듯하다. The Laurie Berkner Band의 유튜브채널에서 노래와 율동을 볼 수 있다.) 사서는 아이들을 일어나게 한 뒤 큰소리로 노래 부르고 쿵쾅거리는 것도 모자라 소리 나는 플라스틱 달걀과 형형색색의 스카프를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계란과 스카프를 흔들며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도 괜찮을 걸까 염려스러울 만큼. 내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이미 손녀를 높이 안아 들고 함께 춤추고 있었다. 이게 무슨 대환장파티람. 그런데 가만 보니 이 모든 것이 그냥 대환장파티는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나름의 규칙과 조절능력의 연습, 배움이 있었던 것이다. 사서는 이 혼돈 속에서도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두 손을 힘껏 올려보자, 이제 그대로 멈춰, 한쪽 다리를 들고 콩콩 뛰어봐"라고 지시하며 수행과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속도대로 그 지시를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즐겁고 편안하게 배우고 있었다.
미국 어린이 도서관 협회에서는 스토리타임이 유아들의 초기문해력과 학교 학습에 필요한 기본 능력을 발달시키는데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그저 재미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유아들의 배움과 연습에 목적을 두고 전문가들에 의해 철저하게 짜인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리고 동네도서관은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곳으로 규정한다. 아이들은 사교육이 아닌 도서관 스토리타임을 통해 학교 수업에 임할 집중력과 자기 조절력, 배움의 즐거움을 따뜻한 배려와 응원 속에서 배운다. 노래와 율동으로 음운인식을 발달시키고 자기 조절력을 습득하며 부모나 가족이 아닌 타인(사서)이 읽어주는 그림책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 집중하는 연습을 한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배우고 그림책과 관련된 즐거운 경험들은 곧 책과 독서, 도서관으로 연결되는 단단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스토리타임의 마지막코스는 만들기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아트테이블에는 색종이부터 반짝이풀, 스티커, 가위, 털방울, 알파벳 글자, 눈알까지 다양한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춤과 노래로 한껏 에너지를 발산시킨 아이들이 조용히 모여 앉아 집중해서 오리고 붙이고 찢고 구기면서 창의력과 소근육을 발달시킨다.
한국의 많은 도서관들이 아직 미성숙한 유아들에게 일반적인 도서관 규칙을 적용시키는 건 조금 이상하다. 아이들이 규칙과 예절을 배워야 하는 건 맞지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티나 난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성장이나 발달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규칙을 만들어놓고 따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아이들로서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도서관에 어느 정도 대환장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과 유연한 마음,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환대가 그곳에 놓여있으면 좋겠다.
재작년 첫 스토리타임에서 보라색 계란을 흔들며 뛰어다니던 내 아이는 이제 어엿한 유치원생이 되었고, 도서관에서는 스스로 살금살금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할 줄 안다. 그리고 지금도 그림책을 보는 스토리타임이라면 언제나 열렬하게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