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늪에 대처하는 방법
나의 슬픔은 <The tiger who came to tea,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 나오는 호랑이처럼 늘 정중하게 찾아온다.
“똑 똑 똑,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좀 들어가도 될까요?”라고 물어본 다음 잽싸게 내밀한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슬픔의 호랑이.
그의 어조는 예의 바르고 상냥하며 차갑다. 호랑이처럼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은밀하게 살금살금 다가와 내가 갖고 있는 좋은 감정들을 가져간다. 이를테면 행복, 희망, 낙관, 이해 같은 것들. 그것들이 사라진 빈자리엔 자기 연민, 자기 비하, 질투, 후회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남는다. 슬픔의 호랑이가 노크한다면 문을 열어주기 전에 염두에 두면 좋다. 호랑이는 결국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영국의 그림책 작가 주디스 커는 <The tiger who came to tea,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 결코 어떠한 심오한 메시지도 숨겨두지 않았다고 (여러 번) 밝혔다. 그저 자신의 독박육아시절 하루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는 것이 지루해서 집에 누군가 찾아와 주길 바랐고 그게 호랑이라면 재밌을 거라고 상상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순수한 시작과는 달리 ‘호랑이’에 숨겨진 의미에 관한 논란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기에 독일에서 자랐던 작가의 성장배경을 바탕으로 호랑이는 나치를 상징할 것으로 해석하는 추측, 호랑이가 ‘남성’으로 묘사되었으며 에로틱하게 그려져 있어 아동 성희롱, 아동성착취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 호랑이는 사실 엄마와 불륜을 하던 내연남을 상징한다는 그럴듯한 해석과 논란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이 순수한 아이와 섹시한 호랑이 이야기는 50년이 넘도록 아이들과 나를 포함한 부모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림책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에게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를 읽어주던 시절 나에겐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으므로 나의 해석은 전적으로 내 느낌에 의존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슬픔이 다녀간 후의 홀가분함과 허망함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림책에서 호랑이는 타이밍 좋게도 소피와 엄마가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찾아온다. 둘은 우리 집에 찾아온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하며 문을 열였고 신사 같은 호랑이가 얼굴을 내밀며 묻는다. 배고픈데 들어가서 함께 간식을 먹어도 되냐고. 그렇게 친절한 소피와 엄마는 호랑이를 집에 들인다. 호랑이는 공손하게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와 빵, 비스킷, 케이크를 먹고 차와 우유까지 홀랑 다 마셔버린다. 그리고서 뻔뻔하게 부엌으로 걸어가 냄비와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도 먹어치우고 아빠의 맥주, 싱크대의 수돗물까지 남김없이 마신다. 그동안 소피는 호랑이를 두 팔로 끌어안고 꼬리를 쓰다듬는다. 마치 조그만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듯이. 그렇게 호랑이는 소피네 집 음식을 다 먹어치우고서 감사인사를 전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나는 호랑이와의 티타임 이야기가 좋았다. 대단한 성공신화나 모험담, 영웅이 등장하지 않으며 도덕적 교훈을 남기지 않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언제든 심심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호랑이가 우리 집에 찾아온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무척 슬펐던 어느 날, 나는 평화로운 티타임에 초대 없이 찾아온 호랑이를 떠올렸다. 아니, 호랑이가 나에게 찾아와 노크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군, 싶은 심정으로 순순히 문을 열어준다. 슬픔이 나를 집어삼킬 때 좀 더 철학적인 발상을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나에겐 어쩐지 그 호랑이가 떠올랐고, 나는 소피처럼 그저 호랑이가 내 감정을 다 먹어치우고 사라질 때까지 (체념이 가미된) 다정한 눈길로 기다려주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호랑이가 떠날 때쯤 나는 공허하고 동시에 홀가분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재정비할 할 공간과 힘이 생겨나 있었다. 나에게 슬픔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만히 들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에게, 주위사람에게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호랑이를 만났을 땐 소란을 피우거나 도망가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줄 것!
아이가 슬퍼하면 호랑이가 찾아왔구나, 가만히 기다려주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우리는 비둘기가 핫도그를 먹는 웃긴 그림책을 보고 색칠공부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기다린다.
슬픔의 호랑이가 떠나길 가만히.
The tiger who came to tea, Judith Kerr/ Harpercollins Childs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최정선 번역/ 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