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너와 함께 행복하게.
아이들과 땅속요정은 성분이 비슷하다.
너그러우며 호기심이 많고 세상 모든 것의 예쁨을 찾아내어 경탄하는 자그맣고 무해한 존재들.
산책할 때 온갖 돌멩이, 나뭇가지, 풀꽃등을 주워와 가지런히 모아두고, 동물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줄 알며 숲이나 산에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들은 ‘땅속요정’ 일 가능성이 높다.
자그마한 두 손에 잎사귀나 클로버꽃, 지렁이나 개미가 들려있다면 더더욱.
당신의 주변에도 땅속요정이 살고 있다.
세상에 요정도 아니고 땅속요정이라니.
우선 땅속요정과 요정의 차이점을 명확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아는 팅커벨 같은 요정들은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우아하게 마법을 부리는 반면, 땅속요정들은 주로 숲이나 자연 가까이에 살며 자급자족한다. 열매를 따고 도토리를 주워 모으고 씨앗을 뿌리고 가꾸면서. 빨간색 고깔모자나 도토리 각두를 머리에 쓰고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 다닌다. 드레스대신 겨울에는 따뜻한 스웨터, 봄에는 활동성 좋은 오버롤, 땅콩 껍데기 같은 걸 입고 손과 옷깃에는 늘 흙이 묻어있다.
땅속요정은 좀 더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가 있는 듯하다.
마치 아이들처럼.
<땅속 요정들의 신비한 세계, The Hidden World of Gnomes>에서는 각자의 본성과 기질에 따라 명랑한 즐거움을 누리는 12명의 땅속요정들이 등장한다. 일상의 루틴이 궤도를 이탈하고 하루의 무게가 무거워졌을 때 나는 종종 이 책을 펼친다. 이들의 일과는 나긋한 축제를 여는 것처럼 다정하게 분주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를 노래와 박수로 맞이하고, 새싹이 돋아난 것을 축하한다. 아침마다 다람쥐의 꼬리털을 폭닥폭닥 풍성하게 매만져주고, 지렁이를 위한 흙케이크, 새들을 위한 씨앗케이크를 굽는다. 그리고 부지런히 즐거움을 찾아낸다. 이를테면 민들레 홀씨를 불면서 소원을 비는 즐거움, 햇살의 온기가 눈꺼풀에 닿는 즐거움, 청량한 빗소리로 귀를 간지럽히는 즐거움, 잘 자라고 속삭이면 너도 잘 자, 하고 되돌아오는 사랑의 안도감 같은 것들 말이다. 선연하게 가까이 있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즐거움들을 땅속요정들은 야무지게 누린다.
그리고 아슴푸레 이해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먼발치에서 민들레 홀씨를 후 불고 있던 아이의 마음을.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 전에 나는 땅속요정들을 떠올린다. 아이는 지금 잠시 멈춰 서서 그 보드라운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일상에서 기댈 수 있는 견실한 즐거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이와 나란히 손잡고 걷는 것,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앉아 그림책을 보는 것,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릴 때 머리카락에 닿는 바람, 강아지 귀의 부드러운 감촉. 온전하게 기쁨을 주는 존재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희하면서 다시 경쾌하게 지낼 수 있다. 땅속요정의 이웃 거미아주머니 말대로 인생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은 심플한 즐거움 들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땅속요정은 야무지고 씩씩하다. <헤이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표지에는 빨간 고깔모자를 쓴 헤이즐이 바구니를 들고 당차게 서있다. 그녀의 하루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흘러간다. 작은 즐거움보다는 숲 속 친구들을 돌보고 열매를 따고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보람을 얻는 유형인 것이다. 나는 사계절에 따라 나뉜 4개의 에피소드 중 여름이야기를 각별히 아낀다. 지금 현재에 머물면서 행복을 누리자고 청유하는 친구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한 명 있다. 밖에 나가 뛰어놀자고, 호수에 가서 수영하자고, 숲에 가서 모험을 하자고 말하며 나를 집밖으로 데려가는 그 친구는 5살인 내 딸이다. 나무딸기를 따느라 바쁜 헤이즐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할 일이 산더미라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그녀를 훌쩍 나룻배에 태워 호수로 데리고 나간다. 그 친구들은 개구리와 숲의 요정이다. 비로소 헤이즐은 나룻배에 걸터앉아 차가운 물의 감촉과 여름의 공기를 향유한다.
나는 이 장면을 프랑스 국립보건의학연구소 소장 미셸 르 방 키앵이 쓴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에 언급된 자연과 신경생리학의 상관관계 이론에 대한 완벽한 예시로 받아들였다.
그는 니혼 의과대학교에서 발표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숲에서 걸을 때 부교감 신경이 100퍼센트 증가하며 이완과 휴식을 조절하는 신경의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자연의 자극은 강도가 낮아서 감각에 휴식을 제공하고 주의력 회복시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경험인 ‘미시적 회복경험 ‘Micro-restorative Experiences’을 제공해 준다. 자주 예민해지고 불안해지는 나에게 아이와 함께 숲을 걷고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것은 회복과 치유 과정인 것이다.
나는 아이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공원과 숲으로 나가고 그림책을 펼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구름과 햇살과 아이의 눈을 바라보기 위해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행복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대기업에 취직하면, 무언가를 성공하면 보상받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일상에 가까이 놓여있길 바라면서.
오늘은 또 어떤 어여쁜 보물들을 찾을까 설레며 바구니를 팔에 걸고 집을 나서는 즐거움. 비싼 장난감이나 아이패드는 없지만 아이의 일상에는 자연의 보물들로 풍요롭다. 토실토실한 도토리, 공모양 이끼, 아기 솔방울, 매끈한 돌멩이, 죽은 호박벌, 이름 모를 빨간 열매, 바람에 떨어진 오래된 벌집, 클로버 꽃은 땅속요정들에겐 오래오래 시선을 두고 싶은 아름다운 오브젝트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이들은 <숲 유리병>이라 삐뚤빼뚤 연필로 쓰인 병 속에 오밀조밀 모여서 아이의 일상을 기념하고 응원한다.
오늘은 천진한 땅속요정과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보자.
가장 다정하고 소중한 존재와 함께하는 산책은 늘 즐거우니까.
영어그림책 목록
The Hidden World of Gnomes, Lauren Solo/ Tundra
Little Witch Hazel a Year In The Forest, Phoebe Wahl / Tundra
헤이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신형건 번역/ 보물창고
Woody, Hazel and Little pip, Elsa Beskow/ Floris Books
Backyard Fairies, Phoebe Wahl / Alfred A. Knopf
참조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미셸 르 방 키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