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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Jan 12. 2022

일반형은 되는데 고급형은 왜 안돼?

앵글이와 약국에서...

2022년 시작을 골골골 거리며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병원을 과별로 투어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반백년도 안 되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네요... 오늘도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이러고 앉아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병원 가는 게 어찌나 귀찮은 일인지요... 아프지 않고 살고 싶어 가는 병원인데 가기 전 준비과정도 번거롭고, 외팔 인생이라 이 추위에 걷는 것도 짜증이 살짝 밀려들어옵니다. 사실 어제가 재활치료를 가야 하는 날이었는데 내과 정기검진 가느라 깜박 잊고 말았지 뭐예요? 하나 하면 하나를 잊고, 매일이 비슷비슷하다 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까먹는 요즘... 점점 땅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마저 든다고 쓰려고 했는데 저희 집이 28층이네요... ㅎㅎㅎ 땅 속으로 끌려들어 가지는 못하겠어요...


오전 8시부터 "나 오늘 병원 가는 날이야!!"를 마치 공약을 외치듯 잠에서 깨어난 가족들에게 일일이 말을 했어요. 남편은 "가~ 얼른..."이라고 무심하게 툭~ 한 마디 던져주었고, 동글이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엄마, 병원 간다고 하지 않았어?"라며 눈은 모니터에 주둥이만 나불나불하네요. '칫!'


그대로 씻고 옷을 입고 나섰어야 했는데 글을 읽다 보니 10시가 다 되어가네요. '에라 모르겠다! 에잇!! 나도 몰라. 내일 갈까?'라는 생각이 쑤~욱~!! 올라오며 소파에 드러누워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읽던 글들을 마저 읽고 있는데 11시가 될 무렵 마치 좀비처럼 앵글이가 어그적 어그적 제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소파에 누운 저를 보며 "엄마! 언제 와도 엄마는 딱! 그 모습이야. 박제 같아. ㅋㅋㅋㅋ"라며 스쳐 지나갑니다. 냉장고에서 샐러드 하나를 꺼내 식탁에 앉으며 "엄마, 일어나서 거실이라도 좀 걸어! 소파랑 엄마랑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니까?"라고 말하네요... '그렇게 핵폭을 날리지 않아도 이미 나도 알고 있다. 딸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시켜 봅니다...


"아, 맞다! 엄마!!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병원 간다고 하지 않았어?"

"했지."

"근데 왜 소파랑 한 덩어리가 됐어?"

"귀찮아서..."

"안 갈 거야?"

"가고 싶어."

"그럼, 가!!"

"귀찮아."

"어쩌려고?"

"몰라."


의욕상실 엄마의 단답형 대답을 들은 앵글이가,


"같이 가줘?"


오메... 웬일이랑가요? 앵글이가 이렇게 배려심 많은 제안을 하다니요... 날이 이렇게 추운데, 외출하려면 준비 시간이 2시간은 걸리는데, 방학에는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겠다던 앵글이었는데 말이죠.


"너, 왜 그래?"

"뭘??"

"왜 요즘 나한테 잘해줘?"

"내가 잘해줬어?"

"응."

"병원 같이 가준다는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야?"

"응."

"ㅋㅋㅋㅋㅋㅋ 맨날 같이 가줘?"

"응."

"그래. 그게 뭐 어렵다고..."

"진짜?"

"응."

"고3 되더니 이상해졌는데?"

"뭐가?"

"착해졌어."

"엄마, 나 원래 착해. 학교에서도 나한테 천사라고 해!"

"제정신이 아닌게 맞구나? 취소!"

"아~ 왜?? 나 진짜 착하다니까?"

"그래, 착한 거로 해!"

"착한 거로 하는 게 아니라 나 진짜 착해."

"알았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새 앵글이는 아침 식사를 마쳤고 12시가 되었습니다. '어랏! 12시네? 병원 점심시간에 걸리겠군... 오늘은 땡!이네...'라는 생각을 할 무렵 앵글이가 다가옵니다.


"엄마, 나 오늘 주민등록증 만들러 주민센터 가야 해."

"뭐야 그럼... 병원 같이 가준다는 핑계로 주민등록증 같이 만들러 가자고 하려고 선심 쓴 거였어?"

"아니지... 병원 가려고 나선 김에 주민등록증도 만들자는 거지.. 두 번 나가는 거 엄마도 귀찮잖아."

"주민등록증 만들려면 엄마랑 같이 가야 해?"

"법정대리인이 같이 가야 해."

"그렇게 쓰여있어?"

"내가 신청서를 잃어버려서 엄마랑 같이 가야 해."

"나 '방역 패스'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찾아봤지. 주민센터는 방역 패스 대상 기관이 아니더라고..."


철저한 앵글이입니다. 이미 다 알아보고 제안을 한 거였습니다... 이러니 맨날 제가 앵글이를 이길 수가 없죠.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로 다시 멍 때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시가 거의 다 될 무렵,


"엄마, 나가자!!"

"너 준비 다 되면 얘기해."

"나 패딩만 걸치면 돼! 병원이랑 주민센터 갈 건데 단장할 필요가 있나?"

"알았어..."


정말 나무늘보처럼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앵글이와 함께 집을 나서봅니다....




무사히 내과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 들렀습니다. 처방전을 내고 의자에 앉는데 진열장에 전시된 콘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올리브O에서 판매중인 제품들


"엄마, 콘돔이 종류가 저렇게 많았어?"

"그렇지."

"그런데 청소년한테는 왜 일반형만 팔아?"

"네가 지난번에 그렇게 말하길래 약사님께 여쭤봤더니 다 판대. 애들이 그냥 일반형을 사는 건가 봐."

"그래? 분명 청소년한테는 일반형만 판다고 들었는데..."

"비싸서 일반형만 사나 보지."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약국에 우리 둘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앵글이 옆에 계셨는데 제가 미처 계신 것을 보지 못했었죠. 앵글이는 등지고 있어서 할아버지 표정을 보지 못했는데 저와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의 표정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당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뭔 엄마가 애를 데리고 저런 대화를 하나 싶어 눈빛에 노여움도 살짝 스쳐 지나갑니다. 등지고 있는 앵글이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네요.


"엄마, 그런데 저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두께 차이도 있고, 콘돔에 젤이 발라져 있는데 젤 성분 때문에 관계 시 감도 차이도 있을 거야."

"오~~~ 그래? 신기하네?"

"일반형은 표면이 매끈하고 조금 두껍고, 초박형은 얇아. 돌기형은 우둘두둘하고..."

"엄마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할아버지와 계속해서 눈이 마주치고 있는데 질문이 멈추질 않고, 저는 또 아이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변은 해 줍니다. 호기심이 생겼을 때, 상황을 마주할 때 그때그때 이야기해주는 편입니다. 오늘 스쳐 지나가면 다시 꺼낼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죠.


"오~ 엄마 고급형은 12,000원이야. 일반형은 4,000원이고..."

"그런데 한 통에 12개 들어있잖아. 계산을 해봐. 그럼 한 개에 1,000원이라는 얘기잖니? 한번 사용할 때 1,000원도 아까운 남자 친구이라면 생각을 좀 해봐야지... 하나에 400원을 쓰느냐, 1000원을 쓰느냐의 문제 아냐??"

"그러네... 역시 엄마는 똑똑해. 그렇게 생각하니 비싼 게 아니네..."

"콘돔만 필요한 게 아니라 젤도 필요해. 젤도 약국에서 파는 건 5~6,000원 정도이고, 산부인과에서 파는 건 35,000원 정도 돼!"

"에잇! 못해먹겠다. 너무 복잡하고 준비할 게 너무 많아."

"젤이 35,000원 된다고 해도 100회 정도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한 번에 350원꼴이잖아. 그럼 콘돔 1,000원에 젤 350원이면 1,350원이야. 근데 이게 아까워?"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니 얼마 안 하네?"

"그러니까 이 정도도 아까워서 못쓰고, 이 정도 준비도 못할 거면 관계를 하지 말아야지."


물론 속닥속닥 이야기를 하기는 했습니다. 약사님께는 안 들리고, 옆에 계신 할아버지께는 들리는 소리지만요... 약을 받아 들고 승강기 앞에 섰는데 할아버지께서도 곁에 서 계셨어요. 승강기를 함께 탔는데 어색한 기류가... 흘러넘칩니다. 차를 지하 3층에 주차 했는데 할아버지께서도 지하 3층에서 같이 내리셨어요. 우리는 차에 올라 함께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욘석이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대화에 신경을 쓰고 계셨던 것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엄마, 할아버지랑 같이 지하 3층이라 놀랐었어."

"너, 할아버지께서 우리 대화 신경 쓰는 거 알고 있었어?"

"응."

"그럼, 차에 와서 묻지 왜 계속 얘기해?"

"뭐 어때? 죄지은 것도 아닌데..."


앵글이는 역시 요즘 아이가 맞습니다. 그렇죠. 죄지은 것은 아니죠... 아직 이런 대화가 익숙하지 않을 뿐... (사실 이후에도 '앵글이와의 성이야기'는 계속 됐습니다. 다 적으면 안될 듯 하여... 이후 생략입니다.)




함께 주민센터에 들러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을 하고 돌아오는 길...

여태 가만있던 앵글이가 배고프다며 호들갑을 떱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초밥을 포장하고, 순대국밥도 포장하고, 빵집에 들러 빵도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역 패스로 매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가 카드를 앵글이에게 줬더니 카드 자율 사용권을 얻은 앵글이가 맘껏 먹거리 쇼핑을 했네요. 왼팔로 운전하고 오른팔은 거들 뿐인데도 돌아오니 오른팔이 화끈화끈 욱신욱신합니다. 팔이 욱신거리니 '아차! 재활치료 가는 날이었는데...' 싶었어요. 오늘도 하나는 놓치고 말았네요. 하나를 수행하면 다른 하나는 놓치고 마는 저는... 정신줄 잡는 훈련이 시급합니다. 매일 같은 일상이 쳇바퀴 돌듯 지나가니 날짜 가는 것도, 해야 할 일도 하나씩 놓치며 살아갑니다. 그러고는 혼자 '뭐 어때!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내일 하지 뭐...'라며 툴툴 털어버립니다. 다친 것은 팔인데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랄까요?


더 늦기 전에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겨울이 되면 안팎의 온도차도 크고, 추위로 몸이 굳어져 작은 부딪침에도 큰 사고가 납니다. 나이 들수록 회복 속도가 느려지고, 한 번 다치면 본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올 겨울, 주변에서는 속속 확진자도, 자가 격리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겨우살이를 잘해 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마음도 생각도 비워가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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