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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 틈도 없이...

by 로운

현이는 요즘 민화에 푹 빠졌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민화 강좌가 두 개 개설되어 있는데, ‘만만해 보이는 수업’을 골랐다가 뜻밖에 ‘빡센 수업’에 걸려들었다고 한다. 붓 하나, 종이 한 장에도 품격을 따지는 강사 덕분에 수강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지만, 현이는 오히려 그런 점이 좋았단다. 정해진 틀 안에서 배우는 게 마음이 편하다나···

문화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실력도 제각각이라, 커리큘럼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매 시간 도안을 들고 와 “이걸 그려보겠다.”, “저걸 해보겠다.”며 강사에게 제안하지만, 강사는 매번 단호하게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싫으면 다른 강좌로 옮기시고요.”

그럼에도 현이는 꿋꿋하다. 궂은소리를 들으면서도 꾸준히 수업에 참여하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붓을 든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현이가 참 대단하다 싶다.


수는 요즘 필라테스에 완전히 빠져 있다. 주 2회 개인 레슨을 받고, 수업이 없는 날엔 유튜브 영상을 보며 혼자 연습한단다. 처음엔 허리를 숙이는 것도 힘들었다는데, 이제는 폴더 자세쯤은 식은 죽 먹기란다. 몸의 변화를 느끼니 더 어려운 동작에도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같이 해보자고 권했지만,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석 달만 꾸준히 하면, 옷장 깊숙이 넣어둔 옷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어···.’
수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맘 잡는 일’이란 게 나라님 잡는 일보다 어렵다.


준이는 몬스타엑스의 열혈 팬이다. 콘서트는 물론, 팬미팅과 해외 공연까지 따라다닌다. 콘서트 한 번 가려면 야광봉은 기본이고, 팬클럽 전용 의상과 대형 카메라, 플래카드까지 완벽하게 갖춘다. 준이가 아니었으면 그런 그룹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대부분은 좋아하는 가수가 생겼다가도 어느새 식어가곤 하지 않나. 그런데 준이는 몇 년째 한 그룹만 쫓는다. 그 꾸준한 열정이 참 대단하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신승훈, 박효신, god에 이어 남편이 좋아하던 들국화, 윤도현 콘서트도 자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둘 태어나면서,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나의 취미생활은 뒷전이 되었다. 살다 보니 내가 가고 싶은 콘서트나 공연보다 번개맨쇼나 헤이지니 공연표가 우선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준이가 부러워졌다. 아이는 아이대로 챙기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니까 말이다.


덕분에 틈만 나면 열리던 ‘우리의 수다방’도 사라졌다. 커피 한 잔 하려 해도 서로의 일정표부터 맞춰야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뭘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효자손이 춤출 만큼 무언가에 푹 빠져본 적이 있었던가. 못하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건 없지만 딱히 “이걸 좋아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다.

할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잔재주 많으면 손발이 고생한다.”
그 말이 나를 두고 하신 예언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일이 몰렸고, 그 일들이 내 빛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늘 시간에 쫓기고 몸만 고되었다.

요즘 친구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걸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바람이라면, 좋아하는 일이 돈도 되었으면 좋겠다. 즐겁게 하면서도 생산적인 일이라면 참 좋겠다. 잘하는 걸로 돈을 버는 건 쉽다. 지금껏 해온 일을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재밌는데 돈도 되는 일’을 찾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생각보다 많지 않고, 생산화되기까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니 말이다.


조바심이 나면 사고가 멈춘다. 마음이 바빠지면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다잡는다. 때려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시작하는 건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을 모으고 있다.


만사 제쳐두고 미친 듯이 빠져들 만큼 신나는 일,
그건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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