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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적 Aug 21. 2023

계약은 '약속'입니다

모릅니다 로 면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래들보다 조금 일찍 회사생활을 시작한 나는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은 사회초년생 시절 서류하나 작성하는데도 최고 45번까지 '다시!(작성)'소리를 들으 나름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더랬다. 약간 덤벙대는 내 성격도 한몫했지만 개개의 서류가 정확히 왜 필요한지 몰랐기에  까이면서 매번 이런 건 '그냥 대충 좀 넘어가면 안 되나?' 투덜대거나, (억울해서 오기로) 까인 횟수도 새었던 이십 대 초반이었다

계약은 상호 간의 약속 같은 거야. 이건 그걸 서류화 한 것이고. 어렵다고 그냥 대충 보지도 않고 넘기면 손해를 입을 수도 있는 거라고. 몰랐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걸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거니까 절대, 허투루 봐서는 안 되는 거야. 게다가 그것에 동의한다고 도장을 찍거나 사인한 거면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건데. 꼭 회사에서가 아녀도 앞으로 살면서 네가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함부로 아무 데나 사인하거나 하면 안 돼. 알겠어?

오래전이지만 그 당시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이사님 말씀이다.

2번 정도 해보고 개선이 안되면 이건 아닌 것 같아로 제치는 나와는 달리 44번 퇴짜를 놓고도 다시 살펴준다는 건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심인가! 천지분간 못하는 철딱서니 하나 가르쳐보겠다고 인내심 있게 지켜봐 준 그 마음이 그저 감사하고 귀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전월세 임대차계약서 작성법, 이미지출처-게티이미지


집 계약은 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에 반드시 계약서로 남긴다. 말(구두상)로 약속한 것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다를 수 있으니 반드시 증거로서 남겨두어야 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조차 서로 오해가 생겨 재판장까지도 가는데 심지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싱가포르이니(공용어는 영어) 당연한 얘기 아닌가. 문제는 예상외로 사람들이 본인의 계약서를 읽지 않는다는 것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들은 아래와 같다.


1. 영어로 되어있어서 -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가 영어를 잘 못해요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요즘엔 파파고, 구글, 네이버 등등 공짜로 검색 가능한 번역기도 많다. 물론 100프로 정확하지 않다 해도 대략 이해할 정도는 된다. 그러나 번거롭다는 이유로 번역해 가면서까지 꼼꼼히 읽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중요 조항은 커녕 사인하는 란에 Landlord(집주인)과 Tenant(세입자)로 나뉘어 있어도 집주인과 세입자 단어 구분도 안 된 건지 '어디에 사인하면 되는 거죠?'라고 묻는 사람들 꽤 있다. 사인 전, "다 읽고 검토하신 거 맞으시죠?"라고 물어보면 사인란 위치를 묻는 그들조차 '아니오. 영어인데 저야 모르죠'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집주인'을 '테넌트'라고 부르는 사람 꼭 있다 (읽은 거 맞다면서요...ㅠㅠ)


2. 내용이 많아서 - 우리나라 임대차 계약서 샘플을 찾아보면 4페이지 정도이다. 내 기억에도 특약등을 포함해 10페이지 미만이었다. 싱가포르는 계약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LOI(레터오브인텐드)까지 하면  계약서만 서술형으로 대략 15-20페이지 정도가 된다.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기재된 것이지만 한국에 비하면 이것

저것 내용이 많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3. 중개인한테 맡겼기 때문에(?) - 중개인이 당신을 대신해 집을 빌리는 게 아닌데, 간혹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개인의 수수료는 말 그대로 중개를 해준 것에 대한 비용이다. 상황에 따라 대변인같이 대응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이익만을 최우선한다는 전제로 고용된 개인 비서/노예는 아니라는 얘기

중요한 것은 중개인 통해 계약을 해도 '중개인의 계약'이 아닌 여전히 '(중개의뢰인) 본인의 계약'이다.

알아서 해주겠지 라는 건 당신의 기대일 뿐 제삼자인 그들(중개인)이 계약상 세입자를 대신해서 결정/시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막말로 갑. 을 간의 계약에 병이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4. (남편) 회사계약이니까(?) - 싱가포르에 주재원으로 왔고, 집은 회사명의로 계약하고 돈도 회사에서 내주니까 난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집을 보고 그 집이 마음에 들어 계약을 결심한 것도, 직접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게 되는 것도 세입자 본인인데 회사계약이니 모르겠다문제가 생겼을 때 계약당사자인 회사에 먼저 확인하는 게 논리상 맞을 것이다. 약속은 (남편) 회사가 하고 직접 겪어야 하는 것은 본인인데 나는 모르쇠로 가겠다? 당신의 행동에 대한 선택은 당신 개인의 몫이다


5. 대충 다 알고 있으니까 -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손님한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다. 다만(계약서는 읽지 않고 문제가 생길 때면) 의례히 "한국에서는.. 한국 같았으면.."라며 항의 같은 대화가 시작되면 짐작되는 것뿐. ('제가 아는 건 이런데 여기 싱가포르도 그런가요?'라는 질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한국인세입자인데, 굳이 영어 계약서를 쓸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생소한 전문 영단어들의 나열로 20페이지에 가까운 서류로 계약을 맺었고 계약 의뢰인인 당신이 그것에 사인을 했다. 이 집으로 정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협박당한 것도 아니고, 각 항목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오로지 본인만이 안다. 즉 100프로 본인의 의지로 '동의한다'는 의미로 사인을 했으면 적어도 그게 어떤 약속(내용)인지 알 법도 한데 밑도 끝도 없이 본인이 아는 한국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들면.. 솔직히 조금 난감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여기서 맺은 임대계약은 당신이 과거에 한국에서 맺은 계약(들)과는 하등 상관이 없으니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한테 '갑자기..?!'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그게 억울함이나 서운함 등의 감정이 담긴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야 한국 사정을 아는 사람이니 그렇고, 전후사정 아무것도 모르는 중개인/집주인이 당신의 이야기를 이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테니 얘 지금 뭐래니? 같은 반응이 나오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로의 권리와 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작성되는 임대차계약서는 아무리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보기를 바란다. 숙제했냐고 재촉하는 엄마도 아닌데 쫓아다니면서 계약서 읽어 봤냐고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 더 세게 말할 수 없지만 본인선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면 사용하고 있는 중개인이든, (중개인이 없다면) 집주인 쪽 중개인이든 물어봐서라도 당신이 어떤 약속에 동의를 한 건지 명확히 알아 둘 것.


그들이 먼저 나서서 당신에게 알려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No way. 그런 일이 일어날가능성은 희박하다.

첫째 당신이 (한국 말고) 싱가포르의 환경이나 계약 조건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를

       계약을 맺은 상대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둘째 한국과 싱가포르 뭐가 다른지 그들 역시 경험이 없기에 차이를 설명할 수 없으며

      (한국인 중개인이라면 알까? 나 역시 한국인중개인을 사용해 본 적은 없어 노코멘트하겠다)

셋째 당신이 묻지도 않은걸 초능력자/무당도 아닌데 알아서 싱가포르는 이래.. 라며 정처 없이 떠든다?!

       (그냥 제정신이 아닌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누구도 밥술을 떠서 당신 입 앞에 갖다 주지는 않는다. 본인의 밥그릇은 알아서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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