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의도하지 않은 작은 변화가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던 2000년 초반, 1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수능 언어영역 지문의 길이가 두 배 가량 길어졌습니다. 긴 지문을 최대한 빠르게 읽어야만 시간 안에 겨우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였죠. 어릴 때부터 문장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공부하던 제게 그런 흐름은 너무나 벅찼습니다. 뭐든 빨리 읽어야 한다는 초조함에 속독 관련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수십 장이 일련의 점으로 채워진 이상한 책을 사게 됐습니다.
‘시야를 확장시키는 법’
‘한 번에 여러 줄을 읽어 내는 법’ 등등......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동안 그 무수히 그려진 점들을 보며 속독에 몰두했습니다. 시야에 최대한 많은 글씨를 쓸어 담으며 문장을 읽어 나가니 마음은 편했습니다. 그런데 속독식 읽기 방식은 제게 난독이라는 질환 아닌 질환을 안겨줬습니다. 이후 ‘낭독’을 접하기 전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난독이라는 지독한 녀석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해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안구 운동으로 읽기 능력이 점점 퇴보됐습니다. 심각할 때는 글씨가 흩어지는 묘한 현상과 함께 짧은 문장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가오는 수능일과 점점 떨어지는 점수는 저를 정신적으로 더욱 압박했고 상태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무엇인가를 읽는 행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읽기 능력이 이렇게나 필요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공무원 시험으로 정하게 된 후, 난독으로 인한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시작한 스터디 모임에서 은인을 만나게 됩니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던 그녀는 엄청난 암기력과 이해력으로 누가 봐도 합격이 예상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와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바로 그 공부법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공부법은 이랬습니다.
‘내용의 이해가 먼저고, 단권화와 속독은 그다음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이해는 낭독으로 시작한다.’
그 당시 공무원 시험 문제도 상당히 길었기에 낭독식의 공부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안 되던 공부라 그녀의 공부법을 따라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책을 소리 내어 읽자 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문장들이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장의 쉬어 읽는 곳을 자연스레 알게 되면서 문장을 의미 단위로 파악하게 되었고, 이는 곧 읽기 능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수년간 간절히 바랐던 속독의 비결을 천천히 읽는 낭독에서 찾다니 말입니다. 낭독식 공부법으로 몇 달은 했어야 가능했을 공부량을 단 몇 주만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었습니다. 읽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수개월간 지속한 낭독식 공부법이 완전히 체화되었을 무렵, 입을 움직이는 낭독식 공부법에서 예전에 속독을 연습했던 때와 같이 묵독식으로 읽어보기로 한 겁니다. 혹시 예전처럼 글자가 흩어지거나 이해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지만 낭독으로 향상된 읽기 능력은 묵독에서도 똑같이 발현되었습니다. 읽기 능력의 극적인 변화와 함께 10개월 간의 수험생활을 마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국어책을 한 명씩 돌아가며 큰 소리로 낭독하는 장면. 그런 시간에 저는 꽤나 소극적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한 글자라도 더 소리 내서 읽을 걸’ 하고 후회가 됩니다.
세계적인 브레인 코치인 짐 퀵은 자신의 책 <마지막 몰입>에서 고대에 읽기는 묵독이 아니라 낭독이 주를 이루었고, 도서관은 떠들썩한 낭독가들의 공간이었다고 말합니다. 묵독은 후대에 수도사들이 문장 사이에 공간을 넣어 띄어쓰기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읽기의 바탕에는 위대한 '낭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낭독이 제 삶에 선사해 준 경이로운 변화들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변화는 제게 낭독의 비법을 알려준 그녀가 지금은 제 아내가 되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인생의 작은 변화가 때론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