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에 입학한 둘째가 기숙사로 떠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집에 더 이상 케어할 아이가 없으니 내 몫의 일이 크게 줄었다. 일이 줄면 그만큼의 시간이 남는 법이니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졌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인 중, 고생 자녀를 둔 지인들은 모두 내가 부러울 따름이다. 하긴, 나도 작년까진 그랬으니. 특히 요즘 같은 시험 기간엔 더더욱이다.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가 있는 4월에 이렇게 맘 편히 있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큰애와 작은애 나이터울이 5살이니 꽤 오랜 기간 4월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렇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겼던 육아에서 완전히 졸업하게 되자 몸은 편하지만 마음 한편 허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나도 저물어 가는구나 새록새록 느끼며 찹찹한 속을 애써 달래고 있다. 그러나 그냥 시간만 축내고 빈둥거리기엔 아직 내 안의 온도는 뜨겁다. 게다가 인생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온갖 칙칙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이때다 싶은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것들이 날 집어삼키기 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다시 나의 24시간을 꽉 채우기로 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는 전국에서도 평생학습 센터가 잘 운영되기로 손꼽힌다. 분기당 수업료가 2만 5천 원인 원어민 영어 회화를 비롯해 무료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수업의 프로그램이 있다. 단 인기 있는 수업은 몇 초만에 접수가 마감되니 온라인 수강 신청 시간이 되면 잔뜩 긴장한 채 휴대폰을 들고 있어야 한다. 도자기 공예, 핸드 드립 커피, 가죽 공예, 제과제빵, 수경재배, 당구 등등 그동안 재료비 포함 공짜로 배운 수업이 수두룩이다. 살짝 깊이가 없긴 해도 나름 유익한 시간들이었던 건 분명하다. 10년가량 꾸준히 다니고 있는 영어 회화 외에 이번엔 추가로 캐리커쳐와 역학, 인문학 수업을 수강 신청했다. 물론 영어를 제외하곤 모두 무료다.
오후 7시에 시작하는 역학과 인문학 수업은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한 교육대학교에서 이뤄진다. 평소 이 시간이면 늘 부엌에 머물렀기에 집을 나서면 곧 낯선 정경이 펼쳐진다. 거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몸은 피곤하겠지만 무표정인 아침과 달리 뭔지 모를 생기가 가득하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을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어진다. 수업에 늦으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도시의 평온한 저녁 풍경을 쫓던 내 시선이 한 무리를 발견하자 잠시 멈춘다. 이내 입가엔 엄마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아이들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다. 버스 정류소와 지하철이 바로 교문 앞에 있으니 이렇게 교통이 편한 학교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요즘 학교는 한창 공사 중이다. 둘째가 입학할 때부터 계획된 공사가 계속 미뤄지더니 수능이 끝난 지난겨울에서야 시작되었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모듈러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덕분에 운동장을 쓸 수 없어 지난 2월 아이 졸업식 때도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제일 곤란한 건 남학생들이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다수의 남학생들은 축구를 못하면 큰일 난다. 큰애는 저녁 급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축구를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와서는 여태 저녁밥을 못 먹었다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 2 학년 때는 그렇다 쳐도 고3이 돼서도 달라지지 않는 아이 모습에 내 속은 복잡했다. 뭐라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그저 꾹 참았다. 이미 엄마에 대해 삐딱선을 탔기에 내 말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비위를 맞춰가며 살살 꼬들겨 공부 시켜야 하니 괜히 서로 얼굴 붉힐 일은 피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숨구멍을 남겨 두고 싶기도 했다. 남학생들에겐 축구가 좋은 놀이인 동시에 아주 유익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운동장이 없어진 탓에 저녁 시간 동안 아이들은 축구를 하기 위해 이웃한 교육대학교를 찾는다. 운동장엔 이미 익숙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교복 차림의 등교때와는 달리 대부분 편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체육복에는 학년을 구분하는 3가지 색상의 패치가 있다. 빨간색이 들어간 체육복을 보면 큰애가 노란색이 들어간 체육복을 보면 작은애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났을 땐 학교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을 볼 때마다 코끝이 찡해 왔다. 사실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순간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기도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당장 다음 주면 군에 있는 큰애는 휴가를 받아 집에 온다. 게다가 어느새 제대가 100일도 안 남았다. 둘째도 5월에 잠시 집에 오기로 했다. 1학기 수업 파행이 만약 2학기때도 이어진다면 아예 짐을 싸서 집에 올 수도 있다. 아이들이 내 곁에 있고 없고를 떠나 그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있다. 마냥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는데 왜 문득문득 떠올라 울컥하게 만드는지. 궁상의 극치를 달리는 남편에게 아이들 학원비는 아예 입밖에 낼 수도 없었다. 결혼가 동시에 그 기세에 눌러 알아서 긴축 재정을 해야 했다. 둘째를 가진 후 일까지 그만둔 터라 더더욱 눈치가 보였다. 시댁과 남편은 아이를 한 명만 원했고 내가 직장 생활도 계속하길 바랐다. 남편은 둘째 유치원비도 아까워 6살이 되어서야 국공립 유치원에 입학시켰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극빈층도 아니었다. 대출 없이 산 자가 신규 아파트에 남편은 대기업을 다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리까지 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하긴, 지금도 그리 살고 있다. 아이들 학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던 남편은 다른 집도 다 이래 산다, 다른 집 아이들은 혼자 공부해도 서울대에 잘만 가더라 등등 터진 입으로 사람 속만 뒤집는 소릴 해댔다. 가진 건 없이 욕심만 많았던 난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의욕과 열정뿐인 매사에 부족한 엄마를 아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큰애는 수능 직전까지 함께 문제를 풀고 인강 수업을 들었다. 입학 원서와 면접 준비도 나 혼자 다 했다. 남들 눈엔 내가 어떻게 비쳤는지 모르겠지만 속으론 부담감과 두려움에 매일 벌벌 떨었다. 내가 잘못해 아이가 혹시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 어쩌나 언제나 노심초사였다. 하지만 내가 불안해하면 아이도 불안해할까 봐 내색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남편이 1이라도 도움을 줬더라면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나와 아이에게 건넸더라면 아마 그의 말년 인생이 더 편안할 수 있을 텐데. 나와 똑같이 그리 현명하진 못한 사람이다.
내 불안 때문에 큰애를 많이 다그쳤다. 아이가 얼마나 갑갑하고 힘들었을지 지금 생각하면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 죄책감은 내가 평생 져야 할 짐이다. 다행히 둘째 때는 나도 경험이 생겼고 아이도 큰애보단 공부에 뜻이 있어 뭐든지 수월했다. 물론 여전히 사교육은 인강을 제외하곤 받지 않았다. 아이는 불안해했지만 자기주도 학습이 아이가 가진 경쟁력임을 나는 알았기에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남편 역시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인지 둘째 성적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채서 인지 그도 아님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싶었던 건지 큰애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아이 때문에 불공드리러 절에 간다고 하면 꼭 옆에 따라나섰다.
물론 매번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품에 안기는 새끼들 때문에 같이 웃고 떠들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다. 같이 나란히 앉아 공부하고 낮잠 자고 같이 머리를 싸매고 생기부 작성하고 면접 준비를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른 어느 엄마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그때 내가 아이들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었더라면 그들 마음속에 기억되는 엄마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거라 싶기도 하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젠 정말 많이 품어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볼 때마다 이런저런 지난날의 씁쓸한 기억들이 떠올라 눈가가 촉촉해 지곤 한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니 어느새 밖은 깜깜해져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아이들 고등학교 앞을 지난다. 교문에선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얼마나 놀고 싶고 얼마나 자고 싶은지 그 맘을 알기에 마음이 짠해온다. 모두 내 새끼 같아 달려가 오늘 하루도 공부한다고 애썼다며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다. 이대로 집으로 곧장 가 좀 쉬면 좋을 텐데 일부는 또 스터디 카페로 발걸음을 돌릴 게다. 안타까운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이다. 이제 막 터널을 빠져나온 엄마로서 아직 진행 중인 엄마들에게 작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속은 좀 타들어가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시고 아이들과 함께 이 시간을 잘 헤쳐나가시라고. 지금 당장은 지긋지긋할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교복 입은 학생들만 봐도 코 끝 찡한 순간이 올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