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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다 보면

by 코니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고 남편과 단 둘이 지낸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생각보단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속내는 편치 않다. 먼저 와 자리를 잡은 갱년기가 빈 둥지 증후군까지 불러들여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낯설지 않은 잿빛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한다.



이미 갱년기 초기 증상으로 한바탕 우울증을 치렀다. 이런 소릴 하면 남편이나 아이는 다소 의아한 눈초리로 날 쳐다볼 것이다. 짜증을 많이 내긴 했지만 우울증이라고까진 생각 못했을 테니. 눈치 없고 공감력 떨어지는 남편도 공부에 바쁜 아이도 내 마음이 아프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도 그건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며 신경 써 줄 사람들도 아니다.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편한 팔자가 무슨 우울증이냐며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할 테고 딸아이는 공부하는 자신이 더 힘들니 그런 소린 아예 하지도 말라할 게 분명했다. 둘 다 똑같이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1년 정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몇 년간 열심히 듣던 수업도 끊고 얄팍한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던 인간 관계도 모두 끊었다. 정 답답하면 혼자 숲 속 절을 찾거나 남편과 낚시를 갔다. 무기력에 빠져 한없이 바닥으로 꺼져만 가던 그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랐다. 그저 가만히 내 얘길 듣고 고개만 끄덕여 줘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 내 주위엔 그럴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두들 내가 건강해서 그들에게 무엇 하나 도움을 줄 수 있어야만 곁에 머무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내가 여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난 무사히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만 살기엔 난 너무 자기애가 강했고 그리 무르지도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조금씩 다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했다. 한동안 끊었던 수업도 다시 신청하고 고맙게도 내 안부를 궁금해하던 몇몇 지인들과 약속을 잡았다.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 어울리면서 차츰 예전의 호들갑스럽고 에너지 넘치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신 그 구렁텅이에 빠져 시들어가진 않겠노라 다짐했다.



당시 온몸을 에워싸던 그 칙칙한 기운을 정확히 기억한다. 자꾸만 아래로 잡아당기던 물귀신 같은 느낌. 서 있으면 앉아라 앉아있음 누워라 집요하게 잡아당긴다.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모든 게 다 쓸데없는 짓거리로 다가온다. 요즘 다시 그때 그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완전히 떠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내게 미련이 남았나 보다. 틈을 노려 언제든 낚아챌 태세다. 걸릴 듯 말 듯 입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재밌어하며 계속 떡밥을 뿌리고 있다. 미끼라는 걸 뻔히 알지만 나 역시 계속 그 주위를 맴돈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가 집을 떠나면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릴게 분명했다. 그 구멍으로 뭐가 들어올지도 예상되었기에 미리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가 짐을 싸서 기숙사로 떠나자마자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2년 전 우울증이 최고조일 때 저지른 큰일이 하나 있다. 우선 그것부터 수습을 하기로 했다.




지난 결혼 기간 동안 그저 열심히 아끼고 살면 언젠가는 옛 생각하며 살 날이 올 줄 알았다. 지금의 궁핍은 다 그때를 위한 희생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독한 자린고비 남편의 행보에 발을 맞춰줬다. '다른 집은 어쩐다더라'에는 아예 눈과 귀를 막고 마이웨이를 외쳤다. 그 고행의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못 해준 거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려진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살았건만 남편은 여전히 숫자에만 갇혀 있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사람이다. 만질 수도 없는 통장 속의 숫자 그리고 통장 개수... 그게 그의 삶의 원동력이다.



물론 자신의 부모를 그대로 학습한 남편도 알고 보면 불쌍하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한 남편의 모습에 화가 나 그의 면전에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죽을 때 관에 얼마 넣어주면 되냐고. 정말 더 이상은 그렇게 살기 싫었다. 하지만 습관이란 무섭다. 돈도 쓸 줄 아는 놈이 쓴다고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날 지갑을 열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면 집이라도 하나 남으니 쓸모없는 낭비는 아닐 테고 무엇보다 그런 동네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허영심이 날 부추겼다. 남편은 이혼까지 들먹이며 결사 반대했지만 수전노가 우울증에 걸린 갱년기까진 이길순 없었다. 고등학생인 딸아이 때문에 당장 이사도 못 들어가는 그 비싼 아파트는 결국 전세를 놨고 올여름 계약이 끝난다.



세입자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이사 들어간다고 알렸다. 살고 있는 집도 부동산에 내놓았다. 매매가 잘 되게 구석구석 20년 묵은 때를 벗겼다. 베란다 화분들도 싹 정리하고 옷장 속 옷들도 모두 꺼내 버릴 건 버렸다. 이사 갈 집 꾸밀 생각에 계속 관련 자료를 찾아 공부했고 모처럼 재봉틀을 꺼내 평소 맘에 들지 않던 소파커버도 교체했다. 몇 년을 방치한 재봉틀인데 별 일 없이 돌아가는 게 신기했다. 나도 저럴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남보다 시간이 다소 자유로운 남편과 외출도 부지런히 했다. 도시락을 싸서 가는 낚시, 소풍은 따로 밥값이 들지 않기에 남편도 좋아한다. 작년까진 고3 딸아이 하교 시간인 4시 30분에 맞춰 돌아온다고 항상 빠듯했다. 이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낚시를 즐길 수 있다. 브런치에 난생처음 연재도 하고 있다. 글을 쓰는 속도가 느린 탓에 매주 한 편씩 발행할 자신이 없어 처음부터 3편 정도 미리 두었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무료 수업도 몇 개 신청하고 한동안 놓았던 붓도 다시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다시 수렁에 빠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참 삶은 만만치 않다. 작년까지 가격도 오르고 잘만 팔리던 아파트가 갑자기 올스톱이다. 나라 안팎이 복잡하니 모두들 선뜻 나서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나 보다. 결국 매매가를 낮췄지만 여전히 찬바람만 불고 있다. 이사 갈 집도 새 아파트가 아니라서 일부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데 집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없으니 남편에게 눈치가 보인다. 안 그래도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데 걱정이다. 브런치 연재도 써놓은 글들을 곶감 빼먹듯 하나씩 다 발행하고 나니 갑자기 조급해졌다. 내 속도상 2주일에 하나씩 발행하는 게 딱인데 욕심을 부렸더니 이것도 어느새 일이 돼버렸다. 예전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자주 막히니 답답하다.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들은 갑자기 일이 생겨 수업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들과 차 마시며 떠드는 게 얼마나 큰 숨구멍이었는데.



속 시끄러운 국내 사정상 딸아이는 수업을 듣지도 못하고 그저 기숙사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지내고 있다. 큰애 때는 코로나로 인해 풋풋한 대학 새내기의 설렘을 하나도 즐기지 못했는데 딸아이 역시 저러고 있으니 안타깝다. 도대체 언제 이 사태가 해결되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는지. 당장 2학기부턴 기숙사에 있을 수 없어 방을 구해야 한다. 수업도 안 하는데 방을 구하는 것도 그렇고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 짐을 싸서 집에 오라는 것도 그렇고 모두 쉽지 않은 결정이다. 만만치 않을 월세도 부담이고 게다가 이사 갈 시기와 아이가 기숙사에서 나와야 하는 시기가 겹쳐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모든 게 맘먹은 대로 되지 않자 다시 반갑지 않은 옛 친구가 찾아왔다. 아직은 문을 꼭 잠그고 있지만 언제 나도 모르게 빗장을 열지 걱정이다. 한 번씩 눈앞이 흐려지기도 하고 할 일이 있음에도 그저 멍청히 휴대폰만 바라보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 이른 시간임에도 이불 속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빨리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어항에 이끼가 끼기 시작했고 물주는 걸 깜빡해 화분 하나를 먼 곳으로 보냈다. 여전히 지긋지긋한 궁상을 떠는 남편과는 또다시 그 궁상이 원인이 되어 요 며칠 계속 냉전 중이다. 단둘이 마주 하는 밥상이 너무 불편하다.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어선 안된다. 이 좋은 봄날 모든 게 파릇파릇 생명력을 뽐내는데 나만 시들어갈 순 없다. 다행히 나에겐 한 번의 경험이 있다. 아무리 나쁜 경험이라도 경험이란 참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오롯이 나만의 학습법을 가지게 해 준다. 날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기에 혼자 힘으로 모든 걸 딛고 일어나야 한다. 뭐가 문제고 내가 할 수 있고 체념할 건 또 무언지 하나씩 짚어본다. 그동안 책에서 읽었던 이런저런 글귀들을 떠올리며 반쯤 물러진 날 다시 단단하게 치댄다.



20년이 된 구축 아파트이긴 하지만 고층 남향에 지하철 1분 거리니 정 안되면 집은 매매가를 더 낮추면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지금보단 안정적일 테니 그때까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물론 남편 눈치를 봐야 하는 곤란함이 있지만 뻔뻔함으로 버틸 수밖에. 딸아이의 수업은 내가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각 단체 대표들의 대화가 일단 물꼬를 텄으니 어떻게든 올해 수업은 시작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내년엔 정말 감당 불가라는 걸 그 잘난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브런치 연재도 내 능력상 너무 버겁지만 모두와의 약속이니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다. 이번 기회에 글 쓰는 속도를 키워보고 꾸준하고 간결하게 글 쓰는 연습도 해 보기로 했다.



남편은... 사실 제일 힘든 부분이다. 나 역시 매사 부족한 여편네이기에 남편만 뭐라 할 수 없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참 안타깝다. 도대체 쓰지도 않을 돈을 그리 모아서 끝끝내 그가 하고자 하는 건 뭘까. 아이들에겐 그런대로 많이 유해졌는데 여전히 나한테만은 자기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때문에 가끔 속에서 열불이 나기도 한다. 남편의 고난의 행진은 그 종착지가 언제 어디일지 모르지만 끝까지 투쟁해 나 혼자만이라도 거기서 벗어날 것이다.




누군가 말하길 인생은 버텨내는 것이라 했다. 어려운 순간을 피하는 대신 그냥 묵묵히 버티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단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 상황을 버틸 수 있는 무던함과 덤덤함이다. 뭐든 조급히 생각지 말고 세상 사람들 다 겪는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 나이에 갱년기를 겪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다. 빈 둥지 증후군도 그동안 내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기에 치르는 훈장일 게고 사실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다. 남편과 결혼한 것도 어쩜 내가 전생에 호사스런 삶을 살았던 왕비였기 때문일 수 있다. 사치와 낭비 온갖 향락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죗값에 이생에서 저런 수전노를 만난 것일 리라.



우울증도 정 옆에 있고 싶다고 하면 빈 방을 내주지는 못해도 주위에 그냥 머물러라 할까 보다. 가끔 이렇게 고마운 글감이 돼주기도 하니. 그래, 버텨보는 거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올 겨울쯤 광안대교가 보이는 거실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지난봄 얘기를 웃으며 글로 쓰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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