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들어서자 입구에 잔뜩 쌓아둔 딸기 박스가 눈에 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값이 나가던 것이 어느새 많이 떨어졌다. 아이들이 있음 2박스는 집어 들겠지만 순간 망설여진다. 집에는 남편과 나 둘 뿐이다. 신혼 때를 제외하곤 이제껏 우리 둘 먹자고 딸기를 산 적이 없다. 그저 아이들 챙겨줄 때 옆에서 한 두 개 집어 먹는 게 다였는데 저 많은 걸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살짝 고민된다. 하지만 새빨간 딸기가 실실 눈웃음을 치며 날 꼬들 긴다. 오늘의 행사품목이라 가격도 착하다나.
한 박스에 고작 6980원이다. 그걸 못 사 주저하는 내가 참 답답하고 한심스럽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 아이들처럼 접시에 소복이 담아 먹지는 못할 테다. 그런들 성인 둘이서 저 싱싱한 딸기가 썩어 문드러지기 전까지 다 먹지 못할까 싶다. 따지고 보면 못 먹어서가 아니라 안 먹어서인데. 세상에 딸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순간 화가 난다. 아이들 입만 입이고 남편이나 내 입은 입도 아니라는 건지.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씩씩거리며 다가가 제일 좋아 보이는 걸로 골라 집어든다.
집 옆에 위치한 마트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행사를 한다. 신선제품이 가격이나 품질면에서 좋아 요일에 맞춰 항상 장바구니 가득 장을 보곤 했다. 하지만 며칠 전 아이가 기숙사로 떠난 후 처음 마트를 찾았다가 낯선 상황을 마주했다. 마트를 나서는 내 손에 쥐어진 게 거의 없었다. 아이가 집에 있었음 분명 살 게 많았을 게다. 알까지 꽉 찬 크고 싱싱한 가자미가 3마리에 9900원이었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일회용 팩에 담긴 걸 한참을 바라보았다.
고기보단 생선을 좋아하는 날 닮아 아이들도 생선 요리를 즐긴다. 저걸 조림으로 해서 주면 아이가 잘 먹을 텐데 싶었다. 물론 남편도 나도 가자미조림을 좋아한다. 아마 아이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아이 핑계 대고 얼른 집어 들었을 테지만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도 없는데 우리 먹자고 저걸 왜 사나 싶어서. 그런데 가자미뿐만이 아니었다.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그렇고 아이가 없으니 모두 굳이 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냉동실을 뒤져보면 두 사람 밥상은 충분히 차릴 것 같아 할인행사 하는 바나나만 집어 들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냉장고란 참 요상한 놈이다. 꽉 차 있음 저걸 언제 다 먹어치울지 스트레스고 텅 비어있음 또 뭘로 채워 넣을지 그게 스트레스다. 적당히가 좋은데 아이들이 있을 땐 그 적당히가 참 힘들다. 항상 꽉 차있던지 아님 텅 비어있다. 분명 중간 과정이 있겠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에 그 순간을 인지할 틈이 없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는 며칠째 그야말로 텅텅 비어있다. 냉장고뿐만 아니라 과자로 꽉 차 있던 서랍장도 똑같은 형편이다. 어젠 간식거리를 찾는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집에 주전부리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아쉬운 듯 돌아서는 남편을 바라보니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의아해진다.
앞으로 쭉 아이들 없이 우리끼리 살아야 한다. 딸애는 학교를 졸업해도 계속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큰애 역시 군제대 후 취업을 하게 되면 방을 구해 내 보낼 생각이다. 결국 내 옆엔 남편밖에 남아있지 않을 테고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겨우 50대 중반에 들어섰는데 적어도 30년은 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녹녹지 않은 세상에 아이들은 지들만의 삶을 꾸려가기도 바쁠 것이다. 아쉬울 때만 떠올릴 뿐 부모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특별히 서운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만 아이들 쳐다보고 살 순 없다. 우리끼리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우선 딸기 한 박스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이래 봐도 나름 딸기 케이크 장인이다. 중탕으로 촉촉함을 더해 구운 카스텔라에 상큼한 딸기잼을 추가한 생크림을 바른다. 그리고 그 위에 딸기를 듬뿍 얹으면 대전 모 제과점 딸기 시루 못지않다. 자주 만들기는 귀찮고 맛있게 먹는 새끼들 모습은 흐뭇하니 남편과 나는 늘 조그만 한 조각에 만족해 왔다. 이번엔 오롯이 우리 둘만을 위한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 실컷 먹어 보기로 했다. 잔소리할 딸아이도 없으니 딱히 모양을 낼 필요도 없다. 그저 맛에만 충실하면 된다. 안 그래도 데코용 슈가 파우더가 없어 그냥 슈가 파우더를 뿌렸더니 자꾸 녹아내려 언뜻 흰 곰팡이가 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거 모른다. 보고 싶은 거만 보는 사람이기에 딸기 케이크 그 자체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남편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슨 날이냐고 내게 묻는다. 그동안 아이들 준다고 많이 못줘서 이번에 한번 양껏 먹어보라 만들었다 했다. 남편은 별 말없이 씩 웃는다. 초에 불을 붙이자는 내 말에 분위기 없는 남편은 무슨 초 까지냐며 그냥 먹자 한다. 같이 촛불을 끄며 앞으로 지속될 남편과 나 둘만의 인생을 축복하고 싶었는데. 이런 멋없는 사람이랑 앞으로 30년 이상 같이 살 생각을 하니 살짝 우울해진다. 더 서글퍼지기 전 얼른 큼직하게 썰어 남편과 내 접시에 한 조각씩 담는다. 맛을 보니 음... 아이 없이 우리끼리 먹어도 맛나기만 하다. 저런 멋대가리 없는 남편과 단 둘이 살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내 등을 토닥여주는 맛이다.
딸기 케이크를 시작으로 다시 장바구니를 부지런히 채우고 있다. 연어 초밥을 좋아하던 아이가 눈에 밟혀 한동안 연어를 사지 못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한 팩을 사면 셋이 먹기 애매한 양이라 아이 것부터 따로 챙긴 후 나머지는 얇게 썰어 개수를 늘렸다. 하지만 이젠 아이 몫이 그대로 남으니 두툼하게 썰어 사케동을 해 먹는다. 아이가 좋아하던 당도 높은 캔디 포도도 눈에 띄길래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깨끗이 씻어 소쿠리째 내놓은 포도를 먹으며 남편은 과장인지 진심인지 모를 소릴 한다.
"와, 진짜 포도 달다. 나는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 우리 애들 생각에 눈물이 난다"
뭐 눈물까지야.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그런 소릴 하면 나도 좀 찡하겠지만 말과 달리 잘만 먹는다.
늦은 밤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매일 밤 엄마와 전화하기로 한 약속은 아직까진 잘 지키고 있다. 얼마 전엔 학교 근처에 그리 비싸지 않은 과일가게를 찾았다며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집을 떠나면 제일 아쉬운 게 과일이란 얘기를 주위에서 종종 들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다 혼자 먹기에 양도 많아 선뜻 사진 못한다 했다. 큰애 역시 과일과 생선 요리가 자취 생활 중 제일 아쉬웠던 부분이라 했다. 사진 속 가격을 보니 다행히 우리 동네 마트랑 비교해도 괜찮았다. 오늘 거기서 과일을 샀나 보다. 그런데 아이 목소리에 풀이 잔뜩 죽어 있다.
"엄마, 딸기를 샀는데 맛이 하나도 없어. 무슨 딸기가 아무 맛도 안나. 그냥 무맛이야"
넉넉지 않은 용돈으로 난생처음 골라 산 과일인데 맛이 그 모양이니 꽤 심란할 것이다. 게다가 그 맛없는 걸 혼자 꾸역꾸역 다 먹어야 하니 그것 또한 곤욕일 테다. 이제껏 맛난 것만 골라 지들 입에 쏙쏙 넣어줬으니 세상 딸기는 모두 다 맛난 줄 알고 분명 모양만 보고 집어 들었을 게다. 하지만 겉만 번드레한 채 아무 맛도 안나는 딸기도 존재하는 법. 어디 딸기뿐이라. 우리네 인생에 그런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존재가 한 둘이 아니다. 아이도 그걸 깨달을 때가 되었다.
달라진 삶이 조금씩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남편과 나 둘 뿐인 밥상이지만 예전과 별 다를 바 없이 차려 먹고 있다. 오히려 그동안 아이에게 양보했던 많은 것들이 우리 몫으로 돌아와 둘 다 몸무게가 약간씩 불었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오늘 뭘 먹었는지 묻지 마란다. 생각보다 잘 챙겨 먹고 있단다. 똑같은 소릴 매일 물어대니 지겨운가 보다. 야무진 아이라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나도 특별히 궁금해서가 아니다. 그냥 인사말로 하는 건데 아직 한국 특유의 밥에 대한 정서를 모르고 있다. 무심한 것, 엄마는 오늘 뭘 먹었는지 뭐 하고 지냈는지 한번 물어보진 않고.
'야, 나도 너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