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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냄새 아이 냄새

by 코니

정확히 32년이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으니 그 시간을 착각할 순 없다. 사진 속엔 하얗게 흐드러진 목련 아래 한껏 웃고 있는 20대의 내가 있다. 작정을 하고 멋을 부린 후 대학 마지막 학창 시절의 봄을 고스란히 사진에 남겼다. 요즘처럼 자연스런 화장이면 좋으련만 촌스럽고 나이 들어 보이는 갈매기 눈썹과 진한 립라인이 눈에 거슬린다. 화장 속에 가려진 앳된 얼굴이 보고 싶은데. 하지만 돋보기를 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진 속 스타일은 지금 유행과 사뭇 비슷하다. 데님 통바지에 오버핏 검정 재킷 그리고 재킷 안에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이 옷.



좋아하는 푸른 계열의 스트라이프에다 소재 또한 편한 니트이기에 다른 어떤 티셔츠보다 손이 자주 갔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연의 자리는 일찍 감치 물러났지만 주인을 닮아 끈질긴 탓에 오랜 시간 조연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예전 사진들을 뒤적이다 보면 이 옷을 입은 채 서서히 늙어 가는 내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낡고 닳게 만든 건 나뿐이 아니었다.



가격에 비해 잘 만들어진 옷임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긴 시간을 버텨내지 못했을 테니깐. 하지만 고이 모셔만 놔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입었으니 성할 리가 없다. 어느 순간 점점 늘어나더니 여기저기 그야말로 삭아서 떨어지고 구멍 난 곳이 생겨났다. 아무리 집에서만 입는다 해도 요즘 세상에 이렇게까지 닳아 떨어진 옷을 입는 사람은 드물다. 이미 몇 년 전 대대적인 보수까지 마친 상태라 더 이상은 무리다. 충분히 입을 만큼 입었기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 옷을 개다 말고 한쪽으로 휙 던져버리고는 너무 낡아 이젠 버려야겠다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딸애가 큰 소리로 외친다.

"엄마, 그거 버릴 거면 나 줘. 내가 입을래"




딸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옷을 좋아했다. 이 옷을 입고 있을 때면 어느새 다가와 내게 꼭 붙어 안겼다. 그러고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소매 안으로 자기 팔을 집어넣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 가슴까지 닿을 수 있었지만 아이의 손은 늘 팔뚝 근처에 머물렀다. 아이를 끌어당긴 건 빈약한 젖가슴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기에. 초등생이 되어도 여전했다. 아이말이 엄마 냄새가 제일 많이 나는 옷이란다. 천 번 넘게 세탁하고 햇빛과 바람에 말려도 오랜 시간 내 살갗을 감싼 흔적은 잘 지워지지 않나 보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내 냄새란 과연 어떤 걸까?



모처럼 집에 온 큰애와 산책 중이었다. 이런저런 말끝에 옷 얘기가 나왔다. 너무 낡아 버리려 했지만 엄마 냄새가 많이 나는 옷이라며 동생이 못 버리게 했다고. 그리고 이젠 그걸 자기가 입는다고. 워낙 많이 입던 거라 큰애 역시 어떤 옷인지 잘 알았다. 그런데 고등학생 이후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던 아이가 대뜸 이런 소릴 한다.

"나도 예전에 엄마 냄새 좋아했는데"

순간 심쿵해진다. 잠시 아이와 난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나란히 걸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과거형으로 말하는 걸 봐서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뭐 특별히 서운하진 않다. 20살이 부쩍 넘은 사내놈이 엄마 냄새 운운하며 품에 안기는 건 나 역시 생각도 하기 싫으니깐. 잠시 남편과 시어머니의 얼굴로 그 모습을 상상해 보자 왠지 징그러워진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성장하면 부모품을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잘 컸단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젠 늙어 내 냄새도 달라졌을게다. 젊고 싱그럽던 엄마의 냄새에서 어느새 나이 든 중년의 진한 호르몬 냄새로.




"푸른색 스트라이프 옷 가져갈 거야?"

기숙사로 가져갈 짐을 싸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니, 부끄러워. 안 가져갈래"

순간 서운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렇구나. 너도 이젠 더 이상 엄마 냄새가 필요치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한편으론 아이의 마음이 이해된다. 다시 꼼꼼하게 고치긴 했지만 그래도 낡을 대로 낡아빠진 옷이다. 같은 방을 쓸 친구에게 보이긴 부끄러울 것이다. 결국 아이는 옷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났다. 옷과 함께 엄마 냄새도.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기 전 잠시 멈칫한다. 아이가 놔두고 간 옷을 꺼내 두었다. 수리를 야무지게 한 덕에 아직 입을만한 데다 긴 세월 함께한 정 때문에 쉽게 버릴 순 없었다. 내가 좀 더 입기로 했다. 옷을 살며시 들어 얼굴로 가져가 본다. 혹시 아이 냄새가 남아 있으려나. 그래도 아이가 몇 년간 입었기에 잘 찾아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다. 하지만 아무리 코를 킁킁거려 봐도 빨래 냄새 말고는 별 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다.



열흘 만에 아이 얼굴을 봤다. 그동안 매일 밤 전화로 수다를 떨었지만 영상 통화를 할 생각은 못했다. 혼자 잘랐다는 앞머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귀엽다는 내 말에 아이는 온갖 이쁜 척을 다 한다. 옆에 있음 엉덩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은데 만질 수가 없다. 마음 한켠이 짠해온다.

"어, 그런데 엄마가 왜 그 옷을 입고 있어? 왜 내 가방에 안 넣어줬어?"

뒤늦게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발견한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듯 묻는다.



"네가 부끄럽다고 안 가져간다며"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듯 아이는 멋쩍게 웃는다.

"맞다. 내가 그랬지"

"근데 이 옷에서 네 냄새가 안 나"

"당연하지, 그건 엄마 냄새가 제일 많이 나는 옷인데"

도대체 그놈의 엄마 냄새가 뭔지. 내 코엔 그저 햇빛에 말린 빨래 냄새뿐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요즘 다시 이 옷을 즐겨 입는다. 딸아이가 그리워서라기보단 입고 있음 예전 젊은 엄마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점점 나이 들고 초라해져 가고 있지만 왠지 이 옷이 중년의 냄새를 희석시켜 줄 것만 같다. 만약 누군가 옛날로 돌아가 다시 아이들 키우라고 하면 못 들은 척 곧바로 줄행랑을 칠 테다. 하지만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엄마 냄새 좋아하던 우리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나도 내 새끼 몸에서 나는 달달한 냄새에 푹 빠져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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