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딸아이에게서 전화 올 시간이 지났건만 오늘따라 늦다. 같이 지내도 연락 없이 늦으면 불안하긴 마찬가지인데 더군다나 아이는 집에서 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있다. 물론 외국도 아닌 한국말이 통하는 곳이지만 이제 갓 대학을 입학한 딸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선 모든 게 걱정 보따리다.
아이가 기숙사로 떠나기 전 매일 밤 전화하기로 약속을 했다. 걱정이 많아 걱정인 엄마가 또 무슨 걱정을 할지 잘 알기에 아이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가끔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에는 그냥 넘어간다. 전화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도저히 잠의 무게를 버틸 체력이 없다. 대신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살아있어?"
그러면 이내 짧은 답이 온다.
"응"
과외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면 아이는 과외를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에 전화를 한다. 과외 장소는 학교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의 한 스터디 룸이고 밤 10시에 수업이 끝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동선이다. 어느 학교 학생인지 스터디룸 이름은 뭔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10시 반이 훌쩍 넘어서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카톡을 보내도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먼저 전화 거는 일은 여간해선 없지만 40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아이 번호를 누르고 있다. 평소 휴대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해놓기에 소용없는 짓이란 걸 잘 안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잠시 후 다시 전화해도 마찬가지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이젠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아이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다급히 확인해 보니 지금 버스 안이라 나중에 내려서 전화한단다. 그제야 시뻘겋게 달아오른 뺨과 심장이 제 온도를 찾아간다. 조금만 더 늦게 연락이 왔음 조바심에 정말 숨 넘어갈 뻔했다. 스터디룸 예약에 착오가 생겨 결국 카페에서 수업한다고 늦었단다. 별 일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살짝 아쉽다. 수업 전 내게 이런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 오늘 과외를 늦게 시작해서 전화가 좀 늦을 거야'
물론 귀찮아할게 뻔해서 아이에겐 입도 벙긋 안 했다. 매일 한 번 생존확인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더 이상 욕심은 화를 부를 뿐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 군에 있는 큰애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자주 통화를 안 해서 그런지 떨어져 산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큰애 전화는 반가운 동시에 약간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특별할 게 없는 군 생활에 특별히 달라질 게 없는 내 일상이기에 매번 똑같은 말만 주고받게 된다. 밥은 먹었니, 춥진 않니,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눈 치운다고 고생이 많지... 지난겨울 유독 눈이 많이 내려 아이가 고생이 많았다.
대충 여기까지 묻고 나면 궁금한 건 거의 다 물은 상태다. 그다음부터가 문제다. 대화를 주도하는 건 언제나 나이기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뭐라도 계속 지껄여야 한다. 그렇게 혼자 애쓰다 보면 슬슬 말이 꼬이기 시작한다. 보통은 이쯤에서 남편에게 바통을 넘긴다. 1분 이상 통화를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기에 깔끔한 마무리로 남편이 딱이다. 그런데 지금은 옆에 남편이 없다. 살짝 힘이 부친다. 그나마 아이와 다가오는 휴가 일정에 대해 얘기하느라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진다. 엄마 아빠와 짧은 낚시 여행을 가고 싶단다. 전화를 끊고 보니 12분 48초나 통화를 했다. 평소 이렇게까지 오래 통화하진 않는데. 애썼다. 아이도 나도.
잠시 후 딸아이에게서도 전화가 온다. 큰애와 통화할 때와는 달리 내 목소리가 살짝 바뀐다. 코 맹맹한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면 아이도 응석받이가 되어 엄마를 찾는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매일 통화를 하기에 그리 궁금할 건 없다. 아이도 시시콜콜한 것까지 엄마에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장난칠 때를 제외하곤 필요이상의 말은 잘하지 않는다. 무사한 건 확인했으니 그다음은 또 똑같은 걸 묻게 된다. 밥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물을 것 다 물었음 빨리 인사를 하고 끊어야 한다. 말 많은 것도 지루하고 똑같은 소리 듣는 것도 싫어하는 아이다. 5분 56초가 걸렸다.
안부 전화를 걸고 받는 일에 익숙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것도 일이다. 용건 없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일이 좀체 드물다. 이것도 집안 분위기라 아이들도 날 닮아 마찬가지다. 예외적으로 큰애와 여자친구 사이의 통화는 일반적인 연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긴 저 무뚝뚝한 남편도 나랑 연애할 땐 자주는 아니지만 제법 긴 시간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달까진 큰애 전화만 챙기면 됐었지만 이젠 딸애 전화도 챙겨야 한다. 아이들은 그저 묻는 말에만 답을 하니 대화를 주도하는 내 입장에선 은근 부담스럽다. 차라리 마주 보고 얘기하라고 하면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다. 아니, 굳이 일일이 말을 안 해줘도 별 일이 있는지 없는지 엄마는 알 수가 있다.
예리한 눈은 아이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들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찾아낸다. 미세한 표정과 작은 몸짓만으로 내 새끼들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다. 어루만지고 쓰다듬거나 그저 어깨를 내어 주는 것만으로 위안과 위로가 돼주기도 한다. 소리라고 꼭 귀로만 들리진 않는다. 눈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보다 많은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귀에 의존하는 소리는 말만 많아지게 할 뿐 작정하면 많은 걸 가릴 수 있다. 게다가 가는 귀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나에겐 더욱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문자나 카톡으로만 연락하길 바라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음 아이들과 연결된 끈이 점점 가늘어질까 두렵다.
큰애는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 군생활을 하는 요즘은 1주일에 한 번 정도지만 자취를 하던 지난 몇 년간 2주에 한 번꼴로 전화가 왔었다. 그래도 처음 얼마간은 1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전화가 왔던 걸로 기억된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 점점 그 간격이 늘어나 가끔 2주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아이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꽤 많이 서운했다. 아이의 전화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건 그저 안부 인사를 받거나 아이의 사생활이 궁금해서가 결코 아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다. 어쩜 아이가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평생 갈 일조차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혹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어디 하나 물어볼 곳이 없다. 대학생이나 된 놈이 부모에게 비상 연락망을 알려 줄 리 없고 친한 친구들 이름은 물론이고 전화번호도 모른다. 별 일없다는 그 한마디만 들려줘도 다음 전화 때까진 맘 편히 지낼 수 있건만 어쩜 그리 무심한지.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전화하진 않았다. 나에겐 이 세상 무엇보다 아이들 전화가 우선이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괜히 바쁜데 방해하는 것 같아 항상 조심스럽다.
아이가 입대를 하고 훈련병이 되자 내겐 좋은 점이 하나 생겼다. 주말 1시간씩만 휴대폰을 돌려줘서 주중엔 전화에 대한 미련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허튼짓할 틈도 없이 가둬두니 아이의 생존 여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까지 주니 내심 국가가 고마웠다. 게다가 정신 교육을 받아서인지 안 하던 고생을 해서인지 부모 생각도 많이 하는 듯했다. 입대 후 첫 전화를 여자친구가 아닌 내게 했을 땐 살짝 감동받기까지 했다. 나 역시 평일엔 읽지도 못할 메시지를 2주 정도 매일 밤 아이에게 보냈다. 평소에 않던 짓에다 할 말도 별로 없어 고심 고심해 가며 써 내려갔지지만 슬쩍 아이 맘을 건든 건 분명했다.
그나저나 다른 집들은 어떨까. 얼마나 자주 통화하고 지낼까. 아울러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자녀가 부모에게 전화하는 횟수는 과연 얼마가 적당할까. 검색창에 '부모에게 전화하는 횟수'라고 입력하자 관련 기사들이 쭉 이어진다. 22년도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평균 일주일에 2.2회 통화하고 한 달에 3.3차례 정도 만난단다. 아... 다른 사람들은 다들 이러고 살고 있구나.
글을 쓰는 내내 아이들과의 전화통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큰애가 자주 전화하지 않은 것도 어쩜 내게 서운한 게 많아서 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딸애보단 정이 많은 아이다. 열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아이임에도 중, 고등학교 때 너무 몰아붙인 엄마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게다. 부족한 엄마라 항상 미안하지만 나름 정말 최선을 다했기에 시간이 지나면 좀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그때까진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연락해 줬음 한다. 딸아이도 조만간 전화가 뜸해질 것이다. 아들 딸 차별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불안한 게 사실이다. 1주일에 2,3번 정도 전화 해 줬음 한다. 긴 통화는 필요 없다. 그런 건 담에 만나서 하면 된다. 그냥 출석체크라 생각하고 생존여부만 꾸준히 알려줬음 하는 바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