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검정 치마 알아?"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뜬금없이 아이가 옷얘기를 꺼낸다.
"너한테 검정 치마가 있었나? 검정 반바지밖에 모르겠는데"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 옷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내내 학교 체육복과 한 몸이었기에 사실 옷도 별로 없다. 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
"아니, 옷 말고 가수"
검정 치마가 남자 가수 이름이란다. 그러니깐 정확하게 '검정 치마'가 아니라 '검정치마'가 맞다. 무슨 그런 얄궂은 이름이 다 있는지.
"유명한 가수야?"
"제법"
이럴 수가. 이래 봐도 가수 이름이나 최신곡 따위는 또래 아줌마에 비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행에 뒤처져버렸다. 몇 달 사이 내가 모르는 유명 신인 가수가 탄생했나 보다.
어쩜 이름은 몰라도 노래를 들으면 '아, 그 노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표곡이 뭐야?"
아이가 제목을 말하는데 모르는 노래다.
"잠시만, 엄마도 들으면 알 걸. 데뷔한 지 좀 오래된 가수라서"
휴대폰 너머 뚝뚝 끊겨 들리는 노랫소리는 무슨 곡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잘 안 들려서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네. 나중에 검색해 볼게"
아이는 다음 주에 있을 잔나비 공연을 보러 갈 생각에 잔뜩 들떠있다. 제일 좋아하는 밴드라 작년에도 다녀왔었다. 당시는 수능을 두 달 앞둔 시점이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 갈등으로 한창 힘들어했다. 이해심 많은 엄마인척 그냥 갔다 오라 한마디 휙 던졌더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반기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아이가 좋아한다니 나 역시 가고 싶어졌다. 티켓을 사 줄 테니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그러나 아이는 정색을 하며 자기 돈으로 티켓을 사고 싶다 했다. 인생 첫 콘서트를 용돈으로 다녀왔다는 뿌듯함을 간직하고 싶었던 게다. 게다가 콘서트는 원래 혼자 가서 즐기는 거라며 기어이 날 외면했다. 영화는 혼자 보러 다녀도 콘서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또 그리하는 게 유행인가 보다.
작년에는 지방 공연에다 수험생이란 신분 때문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면 이번엔 훨씬 규모가 큰 잠실 공연에 대학생이 되어 처음 가는 콘서트라 기대가 사뭇 큰 것 같았다. 여느 때 같으면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고 전화를 끊는데 오늘은 신이 나서 조잘조잘 말을 잘도 이어간다.
"엄마, 얼마 전 잔나비 신곡이 나왔는데 카리나가 피처링을 했대"
아이가 볼 공연 날짜는 이번 서울 콘서트 기간 중 마지막 날이라 했다. 마지막 콘서트에서는 다른 공연과 달리 뭔가 좀 색다른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작년에도 마지막 날을 예매했었다. 눈치가 빠른 난 아이가 무슨 소릴 듣고 싶어 하는지 이미 파악했다.
"그럼 어쩌면 카리나가 그날 초대 가수로 나올 수도 있겠네?"
"그러게 말이야"
너무나 행복해하는 목소리다. 그러면서 올해 06년생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문화비로 콘서트를 하나 더 예매했는데 그게 바로 검정치마의 공연이란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검색해 본다. 2008년도 데뷔라는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인디 밴드라 그런가. 노래가 인기 드라마 OST로 사용됐다는데 드라마를 전혀 안 보니 알 수가 있나. 분명 아이가 나도 아는 노래가 있다고 했다. 한참을 이 곡 저 곡 기웃거린 후 드디어 찾아냈다. 하지만 4분가량의 곡에서 귀에 익은 멜로디는 단 한 소절뿐이다. 아이가 따라 부르던 그 부분.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중, 고등 시절 아이들은 수학 공부를 할 때 언제나 노래를 틀어 놓고 했다. 그냥 듣기만 한 게 아니라 따라 불러가며 문제를 풀었다. 남들 눈엔 좀 의아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아이들에겐 꽤 괜찮은 공부법이었다. 생각보다 수학은 비숫한 유형을 많이 풀고 같은 문제도 여러 번 봐야 되는 과목이다. 문제집당 최소 5번씩은 풀었기에 자칫 지겨울 수 있었지만 음악이 많은 도움이 됐다. 아이들은 다른 공부를 하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노래를 틀어 놓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물론 수학이란 과목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고 별 스트레스가 없는 경우에만 효과를 볼 수 있을게다. 아이 둘 다 수학 성적이 좋았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하게 놔뒀다.
큰애는 나랑 음악 코드가 잘 맞았다. 아이가 듣던 곡은 모두 내 귀에도 캔디였다. 아이는 최신곡이나 유행곡보단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했다. 김 수영, 오르내림, 위아더나잇등은 아이가 아니었음 어쩜 영영 몰랐을 가수들이다. 늦은 밤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아 공부하며 듣던 감성 가득한 그 노래들을 지금도 혼자 가끔 찾아 듣는다.
반면 딸아이는 최신 인기곡 위주로 들었다. 덕분에 요즘은 어떤 노래가 유행인지 누가 신곡을 발매했는지 대충 다 꿸 수 있었다. 새로운 뮤직 비디오가 나올 때마다 영상도 같이 봤기에 가수들도 누가 누군지 대부분 알아보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은 일부러 멤버들의 이름까지 외웠다. 그 많은 세븐틴 멤버들의 얼굴을 보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를 때면 아이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의외로 그게 아이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가수나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옆에 있으니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인기 있는 스타일이나 옷, 화장품 브랜드에서부터 유행어, 놀이 문화, 소비 패턴, 행동 양식까지 저절로 습득되는 것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제일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이런 요즘의 문화를 소개해주는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트민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내 취향과 맞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지조는 있다. 게다가 유행을 주도하는 게 주로 젊은 층이다 보니 이 나이에 따라 하기 쉽지 않다. 딸아이와 유행하는 챌린지를 같이 연습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기이한 현상을 몸소 겪어도 봤다. 고장 난 로봇 같은 내 모습에 박장대소를 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덩달아 웃고 즐거워했던 게 기억난다. 아이가 엄마랑 함께 하기를 원했기에 고맙게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따라 했다. 만약 그때 주착 맞게 내가 이런 걸 왜 하냐며 싫다고 했음 더 이상 자기들의 놀이 문화에 날 끼워주지 않았을 테다.
사실 이 나이엔 요즘 문화를 모른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은 없다. 트렌드를 잘 파악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이유도 유행을 무조건 쫓아갈 필요도 내겐 전혀 없다. 그저 트렌드를 적당히 읽어낼 줄 알고 변화에 낯설어하거나 당황해하지 않으면 된다.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별다른 사회적 교류 없이 늘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기에 새로운 신문물에 갈증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아이들과의 소통에 뭔가 삐걱거리는 게 생겨난다. 카리나가 피처링을 했다고 말하는데 카리나가 뭐냐, 무슨 새 이름이냐, 피처링은 또 뭐냐 매번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엄마와 이런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무슨 할 말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얘기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게 되니 대화는 점점 짧아질 것이다. 얼마 전엔 군에서 휴가 나온 큰애와 네 컷 사진을 찍으러 갔다. 전에도 한 번 가자고 하는 걸 그땐 싫다고 마다했지만 이번엔 두말 않고 따라 들어갔다. 아이들과 잘 지내려면 그들의 문화에 어느 정도 동화되어야 한다. 게다가 시대에 뒤떨어진 채 지난 X세대의 감성으로 살아가기엔 아직 나의 호기심도 크게 쪼그라들진 않았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그땐 정말 늙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지금 과하지 않게 요즘 문화에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는 방법을 나름 고심해야 할 때다.
요즘 문화나 트렌드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과 저녁을 먹다 아이와 통화한 내용을 들려준다.
"아니 다짜고짜 검정 치마를 아냐고 해서 무슨 얘긴가 했더니"
갑자기 남편이 내 말을 가로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안다는 듯.
"검정 치마가 아니라 검정 고무신이겠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온다. 큰일 났다. 남편과 둘만 지내다 보면 정말 검정 고무신이 유행했던 그 시절에 갇혀 지낼 수 있겠다. 어서 빨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