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어진 삶이란 과연 어떤 걸까.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어떤 회사에 취직을 하고 돈은 많이 벌까. 결혼을 하기는 할까.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누구랑 할까. 키가 크고 잘 생긴 사람일까. 그 사람과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우리 부모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렁대지는 않겠지. 혹 같이 살다 도중에 지겨워지면 어쩌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낳을까. 공부는 잘할까...
지난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모든 게 뿌연 안갯속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확신마저 없었다. 주위에 마땅히 도움을 청할 이도 날 이끌어 줄 이도 없었다. 가족이란 존재는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그저 혼자 불안 불안한 발걸음을 세상 밖으로 조심스레 내디뎌야 했다. 알 수 없는 미래이기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오면 매번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지금껏 깡하나로 잘 버텨왔다. 그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마음이 한결 편안했을까.
그렇다고 사주나 점을 보러 가진 않았다. 혼자 그런 곳에 찾아가는 것도 행여나 나쁜 소리 듣는 것도 무서웠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더 큰 이유가 있다. 어차피 사주팔자가 타고난 거라면 달라질 것도 없다. 아는 게 오히려 병일 수 있다.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라면 사주에 아무리 안 좋다 해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화를 피하려 부적을 쓰거나 제를 지내는 것에 돈을 쓸 마음도 없고 믿음도 전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난 그리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악착스럽고 끈질긴 생존력을 무기로 가졌다. 하지만 불안한 청춘이던 20대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용한 역술가마냥 한마디 툭 던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넨 타고나길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니 매사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게나. 사람이 어떻게 매번 성공만 하고 살 수 있겠나. 때때로 힘든 일을 겪게 되더라도 인생 새옹지마라 생각하게. 버티다 보면 좋은 일이 또 따라올 걸세. 그렇다고 자네 인생에 크게 어려운 일은 없다네. 하나 아쉬운 건 자네 사주엔 인복이란 건 별로 없으니 모든 걸 스스로 노력해서 얻도록 하게. 부모 복은 친정, 시댁 양쪽 다 없고 남편 복도 그리 많지 않네. 주변의 도움도 크게 기대하지 말고. 하지만 딱히 불공평하다 싶지 않은 게 자네가 똑똑하고 야무지니 다 극복할 수 있을 걸세. 게다가 말년엔 자식 복도 있다네. 남편 복이 없으니 결혼을 하지말건지 자식 덕 보게 결혼을 할 건지 그건 혼자 정해 보게나. 뭘로 결정하든 자넨 다 잘 버틸 수 있을 걸세'
20대의 내가 이 정도의 정보만 알았더라도 안심하고 보다 맘 편히 삶을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살 거라고 그토록 맘 졸이며 지내왔는지. 악착같이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내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참 안쓰럽다.
70을 훌쩍 넘은 나이 지긋한 강사가 갑자기 여기 돼지띠 있냐고 묻더니 손을 들어보란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궁금해 슬그머니 손을 든다. 두 명이다. 강사가 다른 한 명에게 몇 년 생인지 물어본다. 나보다 24살이나 어린 나이에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는 사이 강사는 육십갑자를 들먹이더니 더 이상 별 말은 없다. 나에게도 똑같은 걸 물어본다. 71년생이란 내 말에 잠시 중얼중얼 계산을 하고는 '무슨 무슨 생 오십 다섯이네요'라고 한다. 그러더니 이내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며 진지하게 말한다.
"올해는 안 좋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그냥 가만있으세요. 조심해야 합니다. 상갓집에는 절대 가면 안 됩니다. 상갓집에 가면 나쁜 기운들이 다 달라붙습니다. 절대 가면 안 됩니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사주 명리학' 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큰 뜻이 있어 수강 신청을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그쪽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뭐든 그냥 내 맘대로 정했지 사주팔자에 의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 사주도 모르니 결혼할 때 애써 남편의 사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궁합 역시 보지 않았다. 결혼날짜도 각자 회사에서 휴가 잡기 편한 날로 둘이 정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세 번의 이사 중 날짜를 따로 받아 이사한 적이 없고 애들 이름도 다 내가 지었다. 아이들 대학 진학 때문에도 어딜 물으러 간 적이 없다. 그냥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이 명리학에 관한 재밌는 얘기들을 자주 해주길래 오로지 순수한 학문적인 호기심에 발을 들인 것뿐이다.
올해 돼지띠가 삼재라는 건 절에서 언뜻 본 적이 있다. 플랫카드에 크게 적혀 있었는데 아마 삼재 소멸 기도 접수를 받는다는 것 같았다. 솔직히 삼재가 나쁘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그게 뭔지도 잘 모른다. 어차피 12개의 띠들이 돌아가며 삼재를 맞을 거고 그렇다면 여태껏 몇 번의 삼재도 이미 겪었을 테다. 모르고 있었기에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다행히 별 일없이 잘 살아왔다. 내 인생에 인지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삼재라는 단어를 강사가 일깨워 준 것이다.
하지만 모르면 또 모를까 저런 소릴 들었는데 무덤덤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매사 조심 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당장 나에겐 큰일이 하나 있다. 가만있어야 된다는데 이사로 크게 움직여야 한다. 집도 이미 내놓은 상태다. 20년 만에 이사인데 하필 올해 삼재에 걸릴 건 또 뭐람. 이사가 계획되어 있다는 내 말에 강사는 극구 말린다.
"절대 안 됩니다. 올해를 넘기고 하세요"
올해 토끼띠와 양띠도 삼재라는데 유독 돼지띠만 손을 들어라 한 것도 그렇고 나 보고만 조심해라는 것도 영 신경 쓰인다. 게다가 강사분이 연륜도 있는 데다 설명도 잘하고 실력까지 갖춰 왠지 무슨 말을 해도 신뢰가 간다. 하지만 삼재라서 이사를 갈 수 없다 말하면 가족은 물론이고 주위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아마 나조차 날 비웃을 게다. 그리고 이사 갈 집도 2년 전에 미리 구입해 지금 세를 놓은 상태다. 세를 든 사람이 다음 달 말에 이사를 나가 지금 살고 있는 집만 팔리면 당장 수리를 해서 이사를 갈 생각이었다. 내년까지 미룬다면 5개월이나 집을 비워둬야 된다는 말인데 아무리 삼재라 해도 그건 좀 무리다.
꼭 이사를 해야 된다는 내 말에 강사가 그럼 어느 쪽으로 이사를 가는지 묻는다. 동쪽으로 해운대로 간다고 하자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는다. 나보고 이사를 가기 전 울산이나 경주에서 가서 이틀이나 사흘 자고 들어가란다. 그러니깐 이사한 걸 누군가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 가서 자고 오란 소리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서쪽도 아닌 북쪽인지. 궁금한 거 투성이지만 더 이상의 개인적인 질문은 수업에 방해가 되어 입을 닫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이대로 집에 가면 소심한 탓에 몇 날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강사분에게 가 다시 물었다.
"아까 선생님 말씀 들으니깐 영 불안해서요. 울산이나 경주에서 자고 오라는 걸 이사 가기 전 미리 해도 되나요?"
마침 울산 쪽에 좋은 낚시 포인트를 발견해 요즘 남편과 한 번씩 가고 있다. 남편에게 이런저런 말없이 그냥 밤낚시 가자고 해서 차박을 하고 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지금이 아니라 이삿짐을 풀어놓고 그렇게 해란다. 내가 너무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이번엔 아까 수업 시간 때보단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남편이랑 그냥 가까운 데 여행 간다 생각하고 하룻밤만 자고 오면 돼요"
평생 사주 같은 것에 관심 없이 내 맘대로 살다 갑자기 이런 소릴 들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그러고 보니 집이 빨리 팔리지 않는 것도 그렇고 요즘 몸이 좀 아픈 것도 주변 사람들과 연락이 뜸하게 된 것도 모두 삼재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어제는 남편이 아파트 산책 중 조그만 개에게 물려서 종아리에 개 이빨 자국이 남겨 왔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 되는 것도 아닌데 정말 그냥 가만있어야 되나.
수업 중 있었던 일을 남편과 딸아이에게 얘기하자 예상대로 모두들 미신이라 코웃음을 친다. 나도 그리 여기고 싶지만 명리학이란 게 하나의 학문으로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오는 걸 보면 영 믿지 못할 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수업도 신청한 것이고. 슬슬 별생각 없이 수업을 신청한 것에 대한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언니, 그냥 성수 뿌리면 돼요. 내가 성당에서 성수 한 병 받아올 테니 이사 갈 집에 미리 가서 구석구석 뿌려요"
성당을 다니는 한 지인에게 명리학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이렇게 말한다. 친정, 시댁 모두 절실한 가톨릭 신자인덕에 태어나자마자 종교가 정해져 버린 그녀다. 하지만 철학관이나 점집을 몇 번 찾은 적이 있어 내가 사이비 신자라고 놀린 적이 있다. 당사자인 내가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그게 뭔 소용이냐고 하니 전혀 상관없다며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녀의 말이 제법 힘이 된다. 그럼 나중에 한 병 좀 부탁하자고 하자 흔쾌히 갖다 주겠단다.
며칠 동안 속이 꽤 시끄럽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재와 상관없이 원래 계획대로 이사를 갈 것이다. 지금껏 타고난 사주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런 것에 맹신할 내가 아니다. 게다가 한번 그렇게 믿기 시작하면 앞으로 계속 쭉 그렇게 살아야 한다. 뒤늦게 사주에 의지해 살 마음도 전혀 없고 그냥 이대로 살다 떠나는 게 나답다고 생각한다. 다만 좋은 게 좋은 거니 나쁘다는 건 피할 생각이다. 이사 갈 집에 미리 가서 성수도 뿌려두고 이삿날 정리도 잠시 뒷전으로 미룬 채 남편을 꼬셔 밤낚시를 갈 생각이다. 절도 올해는 열심히 다닐 것이다. 이쯤 되면 온갖 종교를 다 동원해 내게 닥칠 화에 대한 방어막은 충분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