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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Dec 12. 2024

윤석열을 정신병자라고 안 부르기 운동

당사자성 발언

    오전부터 눈이 돌아갈 것처럼 바쁜 날이었다. 내란 발발 이후로 늘 그렇긴 했다. 그 와중에 팔자 좋게 털레털레 닷새 만에 출근해서 한다는 짓이 긴급 대국민 담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쌍욕을 뱃속으로 꾹꾹 삼켰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보니 그 모든 것들을 입 밖으로 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문재인 금괴', '부정선거' 따위의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음모론을 진지하게 신봉하는 15~20% 남짓의 지지층에 논리를 만들어 주려는 차원이라는 분석은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린다. 다만 최대한 이성을 붙들고 해석한 게 이것이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통신사들의 속보 팝업과 생중계 화면을 번갈아 보며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휘발유를 붓고 불까지 질러 버린 꼴이다. 때문에 "어제까지는 감방에 넣으라고 난리였는데 대국민 담화 이후로 정신병원 넣으라고 난리" 같은 말이 꽤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공감대를 얻고 있는 모양인데, 이건 또 이것대로 배알이 뒤틀린다. 의료 전문가는 아니지만, 윤석열 씨가 일종의 병리적 상태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의사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왜 자꾸 '정신병원'이나 '정신병자'를 욕으로 쓰냐, 이 말이다. 듣는 정신병자 짜증나게.


    이러니까 마음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는 사람도 무서워서 병원에 못 가지. 약물과 상담의 도움을 받으면 초기 진화가 가능할 것 같은 사람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아니, 그전에 웬만큼 마음을 터 놓고 깊게 신뢰하는 사이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 말을 대체로 "당신은 지금 머리에 꽃을 달고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 맨발로 뛰쳐나와 기괴한 춤을 추며 보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협을 가하는 광인과도 같게 보인다" 정도의 욕설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진심 어린 조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훨씬 많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의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 2023'에 따르면 2021년 기준 19세 이상 성인의 우울감 경험률(최근 1년 동안 연속적으로 2주 이상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 등을 느낀 경험)은 11.3%로 나타났다. 18세 이상~79세 이하 성인 인구의 알코올 사용장애, 니코틴 사용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 등 정신장애 평생 유병률도 27.8%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12.1%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뜻이겠니. 자꾸 정신병원을 몹쓸 곳, 살면서 평생 가지 말아야 할 곳, 무서운 곳이라고 손가락질하니까 정작 필요한 사람들이 문턱을 못 넘는다는 것 아니겠니.


    정신과는 좋은 곳이다. 무력감에 짓눌려서 한 끼도 안 먹고 20시간 넘게 잠만 자던 우울증 환자가 힘내서 설거지를 꾸역꾸역 하고 왔다는 보고만 해도 잘했다고 박수를 쳐 주는 곳이다. 증상이 점점 나아지면 투약 용량을 줄이면서 얼른 하산하자고 격려도 해 준다. 얼마나 따뜻한 곳인데. 그리고 정작 찐으로 각종 정신증 때문에 꼬박꼬박 병원 다니면서 투약도 착실히 하는 사람들은 12월 3일 이후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약 용량까지 늘려 가면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작작들 좀 하자. 잘못은 내란 수괴가 했는데 왜 애먼 정신병 환자들이 처맞고 있냐고.


    이상 약 1년 6개월간 단약 중인 우울증 유병력자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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