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리모컨을 쥔 아이

고개를 돌리지 않던 밤

by 우리의 모든 순간

(그날, 남겨진 아이의 시간)


그 장면 이후의 기억은,

언제나 하나의 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엄마 동생 낳으러 갔어.”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이의 두 눈은 안전 가드 너머, 어두운 계단 끝에만 머물러 있었다. 양손으로 차가운 플라스틱 가드를 꽉 쥐었다. 금방이라도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계단 그만 보고 이리 와. 가드 잡고 서 있으면 넘어져.”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었다. 까치발을 한 작은 두 발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짧은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텨보려 했지만, 기우뚱하는 순간 커다란 두 손이 아이의 몸을 덥석 감쌌다.


허공으로 두 발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쳐다보던 계단의 끝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달칵-'

침실 문이 닫히고, 언제나 거실을 채우던 부드러운 빛이 꺼졌다. 동시에, 코끝을 맴돌던 익숙한 냄새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몸은 익숙한 이부자리에 눕혀졌고, 그 옆으로 무거운 기척이 다가와 누웠다.


“열네 밤만 자면 엄마 올 거야.”


알 수 없는 말소리와 함께 묵직한 손이 배를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익숙한 냄새를 품은 이불이 작은 몸을 반쯤 덮어왔다. 그날, 아이는 낯선 온기 속에서 두 눈을 감았다.


새벽이 깊어갈 무렵.

아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쩍 눈을 떴다. 푹푹 꺼지는 이불을 짚어가며, 낮게 깔린 숨소리를 찾아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멈춰 선 작은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온기를 품은 손이었다. 아이는 그 손등 위에 가만히 제 볼을 기대보았다. 한참동안 볼을 비벼 댔지만, 두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


그때, 방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옅은 빛이 보였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여 소리를 냈다.


“마, 마….”


그 순간, 아이의 몸이 뒤로 훅 당겨졌다.


“더 자야지. 아직 새벽이야.”


몸이 강제로 눕혀졌다. 커다란 손이 다시 배를 두드렸다. 아이는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던 그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제 곁에 흐트러져 있던 이불자락을 그러모아 품에 꽉 안았다. 뾰족하게 접힌 차가운 이불 끝이 여린 볼을 건드렸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 감촉을 매만지며, 오지 않는 기척을 기다리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번의 밤이 더 지났다.


아이는 좁은 식탁 의자에 갇히듯 앉혀졌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 숟가락이 입가로 다가왔다. 무심코 입을 벌렸지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이는 꾹 입술을 다물어 버렸다.


“아직 더 먹어야 해. 조금만 더 먹자.”


닫힌 입술을 숟가락이 톡톡 건드렸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볼에 부딪힌 숟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잘 먹다가 갑자기 왜 이럴까?”


다시 숟가락이 다가왔다. 아이는 몸을 의자 등받이 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숨을 헐떡이며 피하려 할 때, 말소리가 들렸다.


“자꾸 안 먹으면, 엄마가 슬퍼할 거야.”


움직임이 뚝 멎었다. 짧은 두 팔에 힘이 풀렸다. 아이는 조그맣게 입을 벌려 숟가락을 받아냈다.


“그렇지~ 우리 강아지 잘 먹네.”


겨우 삼켜 냈지만 숟가락은 다시 다가왔다. 아이는 결국 작은 손을 들어 숟가락을 거칠게 쳐 냈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머리 위에서 날카롭고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몸이 굳었다. 놀란 두 눈에 뜨거운 것이 차오르더니, 이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으아앙!!!”


한번 터진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커다란 팔이 아이를 안아 올렸지만,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울며 고개를 돌렸다. 눈물에 번진 시선은 오직 계단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목놓아 울어도, 계단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세 번의 아침이 다시 밝았다.

아이는 장난감 상자 앞에 내려졌다.


“아침 뉴스 볼 시간이네.”


까맣게 죽어 있던 커다란 네모 화면에서 요란한 빛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손에는 반짝이는 장난감이 쥐어졌다.


“역시 애들은 적응이 빨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기특하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이는 점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둠이 와도. 아이는 더 이상 계단을 바라보지 않았다.


며칠이 더 흐른 어느 날. 굳게 닫혀 있던 문에서 요란한 기계음이 울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엄마랑 아빠 왔네!”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의 손이 우뚝 멈췄다. 현관문 쪽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커다란 그림자가 두 팔을 벌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그 손길이 무서웠다. 아이는 도망치듯 소파 구석으로 가서 몸을 앉혔다.


“엄마가 오래 집을 비워서 화가 났나 보다.”


바닥을 향하던 아이의 시선 끝에 길쭉한 리모컨이 걸렸다. 아이는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일찍 왔네?”

“네, 아침부터 서둘렀죠.”


어지러운 소리들이 허공을 맴도는 사이, 커다란 그림자가 아이의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손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 그 순간, 아이의 손에서 리모컨이 툭 떨어졌다. 아이는 제 손을 감싸 쥐려는 그 손을 거칠게 밀쳐 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다시 주워 들었다.


'탁ㅡ 탁ㅡ.'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버튼을 눌러 댔다. 고개는 빳빳하게 앞을 향했다. 옆에서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얼굴을, 아이는 끝내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마침내 손가락이 꾹 눌린 채 멈췄다.

화면 속 화려하게 번쩍이던 색깔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까맣게 변해 버린 텔레비전 화면. 그 차갑고 텅 빈 검은 네모 안에는, 리모컨을 꽉 쥔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작고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만이 비치고 있었다.


“여보, 둘째 배고픈가 봐. 우네.”


어디선가 날카로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곁을 맴돌던 기척이 머뭇거리다 이내 멀어졌다.

거실에는 다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이는 홀로 소파에 앉아, 까만 화면 속에 갇힌 자신의 얼굴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