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둘째 주
"그 정도면 난 되게 담백하게 썼다고 생각했어."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A씨는 "조금 과한 거 아니냐"는 내 질문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아유..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아."
그렇게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꼬박 1시간이 넘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나 수다쟁이란 것도 몰랐지만, 공무원 사회의 민낯이 그 정도일 줄도 몰랐다.
선약 때문에 내가 먼저 자리를 떠야 했다. 일어나기 전에 물었다. "그러니까.. 고름이 터진 거네요?"
그가 답했다.
"아니지. 이제야 발견한 거지. 고름이 여기 있다고."
지하철을 타면서 생각했다. 애써 외면하고 숨기기 급급했던 공직 사회의 어두운 내면. 그건 '겉으로 보이는 사소한 고름'이 아니라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암'은 아니었을까.
노한동.
행정고시를 붙고, 공무원을 때려친 인물.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궁금해서라도 한번쯤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첫 질문. "왜? "
"도대체 왜 안정적인 길을 때려치셨어요?"
그러므로 이 책은 (모두가 궁금해 할)그 답부터 던지고 시작한다.
무기력.
그를 안전망 밖으로 내던진 강력한 원심력의 원천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한 무기력'이었다.
제 발로 여기를 나가겠다고 생각한 건, 오랜 시간 동안 공직사회의 다양한 헛짓거리들을 경험하며 가랑비에 옷이 젓듯 습득한 무기력 때문이다.(7pg)
두번째 질문. 여느 공직사회(군대를 포함하여)와 마찬가지로 '튀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면, 그는 왜 '튀는 선택'을 했을까. 왜 폭로를 했느냔 말이다. 지인들과 집 근처 호프집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게 아니라, 굳이 내부 고발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곧바로 이어지는 그 답은 '내부고발자로 제격'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치 홍장원 마냥) 호루라기를 불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크게 동감하기는 어려웠지만.
내가 공직사회에 대해 과도한 분칠도, 마타도어식 비난도 없는 정확한 비판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나의 어정쩡한 경력 때문이다. 공직사회를 좀 알기는 하되, 친정에서 별로 받은 것이 없는 나는 공직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를 쓰기에 제격인 사람이다(15-16pg).
세번째. 공직 사회는 얼마나, 어떻게 잘못됐나. 정확히는 '한 개인의 인생을 내던질만큼' 잘못된 건가. 물론 그의 결론은 '그렇다'이다. 공직사회는 끊임없이 책임을 회피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노한동은 말했다.
한마디로, 공직사회는 끊임없는 면피의 세계다(32pg).
애초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만약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게 내가 되지 않으려 하는 공직사회.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는 바로 이 단어. 영리해서 무능한 관료(영무관).
이러한 공허함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영리해서 무능한 관료'의 모습이다. 이는 곧 공직사회의 전반적인 무능으로 이어진다. 나는 관료가 공직사회라는 이상한 세계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세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며 무능을 공고히 하는 주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85-86pg)
그리고 바로 그 '영무관'에서 제목이 튀어나온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무능과 무기력을 숨기는 공직사회의 관성(281pg)
영무관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무능과 무기력을 숨긴다. 그리고 공직사회는 그 딱딱하고 더러운 관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노한동은 이 사회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니 그 사회를 뛰쳐나온 스스로를 '엑소더스한 모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순수한 독자의 눈은 조금 다르다. 상호 간의 온도차를 줄여내지 못한 부분이 못내 아쉽다. 앞선 '무기력'과 함께 '모욕감'이라는 감정이 그를 에워쌌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브런치에 개인적인 글을 쓰고 난 뒤) 내가 느낀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모욕감이었다. 조직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내 앞에 거대한 실체로 다가와 나를 짓누르고 떠난 느낌이었다.(96pg)
어쨌든 노한동은 거침없이 말한다. 개인이 조직을 바꿀 순 없으니, 조직이 개인을 바꿔버린 주객전도 사회로 전락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비난 표현은 더욱 과격해진다.
'높으신 나리(105pg)'에서, '예산의 진정한 목적은 관료의 생존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있다(116pg)'를 거쳐, '대통령의 근엄한 지시를 담은 뉴스를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실소를 멈출 수 없(126pg)'으며, '공직사회는 기회만 되면 이런저런 연줄로 인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내 정치가 너무나 빈번한 곳(235pg)'이라는 확정적인 언어가 나를 당황케 했다.
하지만 공직사회는 노한동이 충분히 알 수 있을만큼 작지 않다. 그렇기에 그의 주장은 부분적 사실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부분적 거짓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예컨대, 이 주장을 보자. 공직사회는 물(水)인가.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살아야만 하는 무의미한 곳일까?
공직사회의 의사소통은 항상 한 방향이었다. 위에서는 아래로 지시만 했고, 아래에서 위로는 보고만 했다. 그러다보니 정책의 결론은 항상 정해져 있었고, 그 결론을 짜맞추기 위한 지난하고 무의미한 작업만 진행되었다.(40-41pg)
2020년 강원도 고성에서 큰 산불이 났다.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전국 소방 동원령 3단계를 내렸다. 전국에서 소방력을 동원하는 '화재 대응 최고 단계'였다. 공무원들이 일하지 않았으면, 피해는 더 커졌을 거다.
2022년에 10.29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당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참사 발생 직후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유족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행안부 공무원들이 2년만에 갑자기 무능해지고, 무의미에 빠져 허덕였던 것일까? 전혀 아닐 거다. 공직사회는 저 멀리서 침을 뱉어 변화하기는 불가능한, 대단히 복잡다단한 조직이다.
즉, 노한동의 주장은 분명 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은 분명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약간의 공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공무원 사회가 굳어버린 채 발생하는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사회의 몫이다. 게다가 정말 무서운 건 정책 집행의 외주 비용이 국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112-113pg)
혼자 너무 유난인 것 아니냐는 말은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이다. 어느 조직에서든 개인이 처한 현실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관료의 행태를 단순히 개인의 먹고사니즘 수준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은 구체적인 정책의 실패로 이어지고 그 여파는 국민의 일상, 즉 당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158pg)
네번째 질문.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뭔가? 그렇게 썩어빠진 조직을 구해낼 방법은 뭘까. 결국 원론적이고 한칼에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해결책은 한결 같다. 바로 '비효율의 제거'다.
쓸데없고 무의미한 업무, 즉 가짜노동과 불쉿 잡의 제거다.(263pg)
가장 눈에 띄는 건, 보고서 쓰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는 부분이다. 예쁜 보고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부문에서 추락을 거듭하기 시작한 무렵, '비기술직인 리더십(임원)이 이해하기 쉽도록 보고서를 쉽게 써서 올리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풍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다.
보고서를 예쁘게 쓰기 위해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평탄화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실제의 상황을 왜곡하거나 단순화한 보고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직사회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곳이지, 보고서 예쁘게 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에 가닿지 않는 보고서는 그 자체로는 쓸모없는 아래아한글 문서에 불과하다.(56-57pg)
꽤 틀리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여느 속담이 그렇듯, 꽤 틀리지 않은 말이 '현실에 당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노한동은 과연 오래 서 있을 수 있을까.
나의 마지막 다섯번째 질문은 이렇다. '그가 오래토록 공직사회와 척을 지고 맞짱을 뜰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 처절한 맞짱을 링 밖에서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텐데. 그 기우가 나를 이 독후감으로 이끌었다.
제목 :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짓말>
저자 : 노한동
출판 : 사이드웨이
발행 : 2024.12.26.
가격 : 16,200원
기타 : 사회/정치부문 13위(교보문고/3월 15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