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셋째주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걸까.
우리 사회를 추동하는 힘은 뭘까.
사회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 졸업할 때까지 이 질문에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답을 찾고 세상의 방향타를 돌려 '옳게 만들겠다!'라는 원대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추동력을 높이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조그마한 청계천 물이 흐르는 이유(상류 순환 시스템)에서부터, 커다란 바다가 만들어내는 밀/썰물 원리(달/태양 만유인력)마저 이해하는 21세기에,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예컨대 '우리는 어떻게 사는 걸까?' 혹은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 걸까?'에 대한 질문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불현듯 '과거에 천착했던 질문' 해답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 사회는 노동으로 굴러간다. '노동 산물'이 또 다른 '노동 원천'이 되어 서로 물리고 물리는 종속관계를 만든다.
그런데 그 '노동 산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한 정치인 표현에 따르면 '투명인간', 한 언론사 표현에 따르면 '6411' 목소리가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거리와 건물, 다양하게 준비된 음식들, 아픔을 돌봐주는 사람들까지.
이런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명함'이다.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잡다한 정보를 마구 넣는 구태의연한 방식이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이고, 직책은 뭐고, 어디서 일하고,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등등.
하지만 명함이 없는 경우라면?
'남들을 향하는 노동'을 하지만,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실재한다. 아니, 꽤 많다.
명함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쉽게 주어지는 것,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 하루에도 수천 장씩 뿌려지고 버려지는 것,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리를 과시하는 것, 능력을 증명하는 것,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위로.
한 장의 명함엔 여러 정보가 담겨 있지만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는 보여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이자 진짜 일꾼으로 살아온 그들의 가치를 기록하고 싶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집중한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노년 여성에 집중했다.
수면 아래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의 이야기, 명함 없는 언니들을 인터뷰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기획 기사의 출발점이었을 테다.
"평생 일하셨는데요. 혹시 명함 있으세요?"
"아뇨. 뭐 하러. 안 만들었어요."
그렇다. 내가 만난 대학 청소노동자 김나경과 유하진, 원각사 무료 급식소 자광명, 우유배달부 김태용 등등 모두 명함이 없었다.
2022년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수면 아래에 있는 언니들을 직접 찾아갔다. '명함이라도 만들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나간 현장에서 '숨어있던 기구한 사연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기자들은 경탄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하지만 언니에게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안 대단하면 어떡해!"
열패감, 절망감, 다만 자부심과 희망이 약간 겹쳐진 한 마디였다.
우리 사회 필수노동자 67.4%는 여성, 32.6%는 남성이다. 배달원과 자동차 운전원을 제외한 모든 직업에서 여성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 수치는 외워두도록 하자. 여성이 약 2/3, 남성이 약 1/3.).
그들의 노동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마주할 혼란은 어떤 것일까.
인간다운 삶, 기초적 생활, 위생적 환경, 노동할 수 있는 자유, 몸과 마음의 건강이 근간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사·육아의 공백은 많은 부모의 경제활동을 중단시키며, 돌봄 노동의 공백은 간병이 필요한 환자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생존의 위기로 내몰기 때문이다.
청소의 공백으로 일상 공간이 방치되고 위생 문제가 누적되면서 방역과 보건에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지하철 손잡이를 닦던 이들, 화장실 세면대 물기를 훔치는 이들, 쓰레기통을 비우던 이들, 사무실 창문을 열고 계단을 쓸던 이들이 사라지고 나타날 일들이다.
그 공백은 사회를 멈춰 세우고도 남을 만큼 크지만, 그만큼 중요한 그 노동은 너무도 값싼 비용으로 유지돼왔다. 모두가 꺼리는 적은 임금, 열악한 근무환경, 불안정한 일자리, 감염 위험, 직업을 낮잡아 보는 인식을 고령층 여성들이 감수해 온 덕에 이 사회가 유지됐다.
이렇듯 언니들은 분명한 성차별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겪고 또 겪었다.
오늘날에도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설명하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울고 싶을 때가 없었냐'는 질문에 이광월은 이렇게 답했다.
울 시간이 있어야 울지.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있어야 울지.
너무 힘들어서 ‘나는 못 살겠다’ 하고 큰애를 업고 주문진 바닷가까지 나왔어요.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이게 무슨 돈이 있어야지. 돈이 있어야 버스를 탈 거 아니래요. 하루 종일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할 수 없이 도로 걸어서 들어갔어요.
용감하지 않으면 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들어요. 힘들다고 한 번도 안 했어. 살면서 지금 처음 해요. 이런 이야기를.
뒤이어 기자가 손정애에게 물었다. "좀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은 안 드세요?"
다시 태어난다면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그랬던 것이 굉장히 후회스러워요. 손녀들이 서로 다른 문방구 간다고 싸우면 저는 둘 다 가자고 해요. 만날 양보하면 나이 들어서도 양보할까 봐. 옛날엔 양보하는 게 미덕이었지만 요새는 미덕 아니야. 나는 그게 싫더라고요.
시대를 탓하기 전에, 발붙인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악착같은 의지가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이렇게 길게 이어진 인터뷰들 가운데 본심이 툭하고 튀어나온 대목이 있었다.
사실 순자 씨가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재밌게 살고, 힘들게 살지 마. 살아보니까 인생이… 그렇게 길지가 않아.”
수면 아래에서, 명함 없이, 묵묵히, 우리 사회를 추동한 노력들을 수면 위로 일궈내기 위한 기획. 그 기획이 다다른 결승선. 그곳엔 대단한 교훈이 있진 않았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후회와 다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만이 물씬 풍길뿐이었다.
경향신문은 이 책 끝에 이렇게 썼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가 끝났다. 명함을 화두로 시작했지만 명함 따위 필요 없는, 인생 자체가 멋진 명함인 분들이 삶의 가치를 발견해 가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다.
당신에게도 이 여정을 권한다.
제목 :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저자 :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출판 : 휴머니스트
발행 : 2022.12.20.
가격 : 16,200원
기타 : 민주언론시민연합 이달의 좋은 보도상,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창간 76주년 경향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