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첫째 주
여기, 본인을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옐화블)’라고 소개하는 중학생이 있다. 그의 정체성은 어디 학교 몇 학년 몇 반이 아니다. 이름도 아니다. 색깔이다. 영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확정된 인종이다. 그런데 블루..? 청(靑)인? 이른바 ‘옐로(아시아계, 책에서는 일본)’와 ‘화이트(유럽 및 북미계, 책에서는 영국)’는 알겠지만, 블루? 우울함을 뜻하는 (약간의) 블루는 책장을 덮을 때야 비로소 이해된다. 이건 일종의 블랙코미디였다는 걸.
옐화블 이야기는 중학교부터 시작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고 잘 풀리기만 해서, 솔직히 재미없을 정도’였던 명문 가톨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밑바닥 공립 중학교에 입학한 어느 날. 옐화블 앞에 모르는 차가 서더니 어떤 남자가 창을 내린다. “퍼킹 칭크!”라고 소리친다.
옐화블은 그걸 담담하게 기억한다. “그 사람을 안 보려고 그냥 입 다물고 다른 곳을 봤어. 그러니까 금방 갔고.” 엄마는 더 담담하게 대답한다. “응, 그러면 됐어.” 더, 더 담담하게 옐화블은 말을 이어간다. “내가 어렸을 때 ‘칭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도 다른 데를 봤었어.” 옐화블이 겪었던 모든 경험은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옐화블 엄마는 차별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뼈저리게 안다. “‘인종차별에 맞서 가운뎃손가락을 쳐들며 전투 의지를 표명합시다’ 하는 것은 사회운동 세계에서나 통하는 말”이며 “영국의 길거리에서 몸집 작은 중학생이 그런 의지를 드러냈다가는 차에서 내린 상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것”이란 것도.
그러니 옐화블 엄마는 납작하다. ‘차별과 격차가 얽혀 복잡미묘한 친구관계에 대해 아들이 상담을 요청할 때마다, 어떠한 답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문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해파리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바다를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도 느낀다.
반면 꿋꿋하게 생활하는 옐화블은 납작하면서도 둥글둥글하다. 일종의 접시 같달까. 뭐든 담을 수 있는 접시. 혼혈은 ‘나쁜 점도, 좋은 점도, 없’다고 쿨하게 받아들인다. 차별 없이 모두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서로 복잡다단하지 않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라며 수선한 교복을 친구에게 건넨다. 거기엔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단순한 진심뿐이다.
감성은 이성을 뛰어넘고, 진심은 감성을 뛰어넘는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는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지만,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불편을 감수하려는 진심은 계산적인 어른들을 번번이 깨뜨린다. 깨진 어른들은 그제야 열리기 시작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선 이걸 ‘부서져 열리는 마음’이라고 한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 우리는 부서져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 마음이 요구된다. 부서져 열린 마음은 성직자들에게서만 발견되는 드문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이렇게 흔히 발견되는 진심은 인종차별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옐화블이 입증했다. 따라서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 아이를 길러준다(It takes a village)’는 말은 더 깊이, 더 멀리 확장돼야 한다. 진심 어린 말이 납작해진 엄마를 둥글게 만들테니까. 둥근 아이를 아름답게 변화시킬테니까.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다.
제목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저자 : 브래디 미카코
번역 : 김영현
출판 : 다다서재
발행 : 2020.03.20.
가격 : 12,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