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면 되는데, 그중 하나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 해. 이해했어?
전입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담임은 '이제 네 차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전입생에게 쏠렸다. 전입생이 입술을 달싹이다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 나는..... 외동이다.
순조로운 시작에 담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 다음을 허락하듯 전입생에게 눈짓을 보냈다.
- 나는 작년에 다리를 다쳐 축구를 관뒀다.
- 그리고?
담임이 추임새를 넣었다. 전입생이 무심코 교실 안을 둘러보다 어딘가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담임이 채근하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 그리고?
- 나는 돼지갈비를 싫어한다.
- 또?
- 나는...... 어릴 때 못을 밟아 발을 다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발로 쏠렸다. 하지만 발목 위로 오는 긴 양말을 신고 있어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 그리고?
- 나는 누군가의 손을 놓쳐 그 사람을 잃은 적이 있다.
- 마지막으로?
깊은숨을 내쉰 뒤 담담하게 말했다.
- 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본다.
순간 교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동시에 와아아 웃었다. 그래서 소리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딱 한 명 웃지 않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바로 그 전입생이었다.
#Scene 2. 삶은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힌다
그 밤, 만취한 아버지는 엄마를 칼로 위협했다. 채운은 그 칼을 뺏으려 아버지와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엄마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개수대 수돗물로 씻었다. 그리곤 부엌 바닥에 고인 피를 자기 손과 티셔츠에 묻힌 뒤 경찰서에 전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경찰이 왔고 엄마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채운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 뒤늦게 엄마를 쫓아나갔다.
- 저기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채운을 돌아봤다. 채운은 어서 모든 걸 바로잡고 싶었다. 경찰차에 탈 사람은 나라고, 엄마는 아무 잘못 없다고, 그러니 나를 잡아가라고 모두에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채운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엄마가 경찰에게 "우리 애가 많이 놀란 모양인데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되나요?"물었다. 경찰은 잘 훈련된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피 묻은 티셔츠 차림으로 채운에게 다가왔다. 그걸 보자 채운은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밤, 채운을 힘껏 품에 안은 엄마는 채운의 귀에 대고 오직 채운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속삭였다.
- 너 여기서 한 마디라도 하면 이번에는 엄마가 죽어. 죽을 거야.
#Scene 3. 우리는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
- 그런데 왜 만화야?
- 어?
- 조각도 있고 뭐 디자인이랑 다른 것도 많은데, 왜 만화인가 해서.
지우가 곰곰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 돈이 덜 들어서?
소리가 풋 하고 웃었다.
- 그리고?
지우가 잠시 뜸 들이다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난 반댄데.
- 뭐가?
- 난 시작이 있어서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만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그런가?
- 응.
#Scene 4. 우리는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 수 있다
1학기 작문 시간 때였다. 그날 국어 선생님은 칠판에 몇몇 단어를 적은 뒤 아이들에게 시를 써보라 했다. ‘각 단어에 얽힌 추억도 좋고 엉뚱한 상상도 괜찮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자유롭게 적어보라’고. ‘다만 한두 문장 정도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단어를 연결해 지어보라’고 했다. 칠판에 적힌 단어는 다음과 같았다.
눈송이. 강아지. 가족. 털실. 가난. 이별. 달리기.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뒤 몇몇을 지목해 시를 읽게 했다. 지우는 그날 호명된 다섯 아이 중 하나였다. 지우 차례가 되자 지우는 긴장한 탓에 시작부터 헛기침을 했다.
- 제목. 눈송이. 2학년 1반 안지우.
지우가 잠시 숨을 가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난이란......
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 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시라 해서 무심코 적어 낸 문장이었다. 누군가 "이거 혹시 네 얘기야?" 물으면 "그럴 리가"하고 어깨를 으쓱하면 되니까. "실제로 우리 엄마는 늘 두통에 시달렸어"라든가 "아빠가 만든 두통이야"라는 말은 안 해도 무방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