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효상 이로재 건축사무소 대표
"저는 건축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나쁜 삶을 살게 될까 주저합니다. 저는 일필휘지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삶을 악하게 만들까 봐 늘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승효상 건축가는 1952년 생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한 경력이 있다. 경력만 50년이다. 그런 건축가가 불안하단다. 두렵단다.
무릎을 쳤다. 공간이 사람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규정하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절절하다.
도처에 널린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소위 말하는 '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직접 행동에 옮겨야 한다. 일선에서 움직이는 노년의 건축가는 사회적 해법을 공간에서 찾았다. 가지지 못한 '빈자'의 미학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치열한 고민의 결과가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서 나온다. 사회의 문제를 공간적 해결법으로 입증한다.
그게 거장이다. 우리 사회엔 더 많은 승효상이 필요하다. 미래 사회엔 제2, 제3의 승효상을 길러낼 수 있을까.
오늘의 이야기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 배에서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지 못했을까’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과 너무 즐거웠습니다.
자,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국제정치적인 이유를 잘 알지 못하지만, ‘왜 하필 이 건물이었을까’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미국과 서방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 건물을 무너뜨리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날 여기에 근무하러 왔던 3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 건물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이유였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가장 높지 않았다면 다른 건물이 목표지점이 됐겠죠. 우리는 그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건물을 마천루라고 합니다. 우리가 내렸던 대만의 타이베이 101 같은 거죠. 마천루라는 건 ‘하늘을 닦는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스카이 스크래퍼라고 하는 영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높이 올라간다는 건 인류의 오래된 소망이었습니다. 예컨대 7세기 중남미에 지어진 마야인들의 피라미드를 보면, 내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흙과 돌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오로지 높이 올라가려는 것밖에 기능하지 못합니다. 7세기 이 건물을 공사할 때는 인력과 물자가 들었을 건데요. 성경에 보면 바벨탑 이야기도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땅에 사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높은 건물을 짓다가 신의 노여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은 무너집니다. 예로부터 많은 건물들이 실력이 부족해서 무너진 경험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그 대신 탑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넣기 위한 탑을 높이 지었습니다. 높은 건물, 고층 건물을 짓지 못하니까 축소해서 작게 지은 게 이런 겁니다. 돌로 만든 3층 석탑 같은 것들이요. 크기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고층 건물에 관한 소망은 인류의 오랜 희망이었는데, 이걸 고딕의 시대에서야 해결했습니다.
건축에서 가장 하이테크의 시대를 말하라고 하면 ‘고딕의 시대’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콘크리트를 발명합니다. 돌, 나무, 흙이 아니라 거푸집으로 무한대로 짓는 걸 발명한 게 로마인입니다. 그 이후로 건축이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하지만 그때도 높은 건물은 못 지었습니다. 고딕 때에야 가능합니다.
고딕 건물은 내부에 ‘피어’라고 하는 기둥과 ‘플라잉 가드’가 연결되어 높아집니다. 이 이후로 돌과 시간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높이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고딕 건축입니다.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선 천정이 있어야 했는데요. 여태까진 벽을 두껍게 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정성 때문에 창도 잘 못 냅니다. 하지만 이제 고딕은 기둥을 지을 수 있어서 큰 스탠드 글라스를 넣는 벽을 만듭니다. 황홀한 내부 공간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딕은 ‘신본주의 건축’이라고도 합니다. 신을 찬양하기 위한 건축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자기가 신적인 위치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라고 해서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 그 뒤에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문화가 이어집니다.
르네상스는 모든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 권력을 가진 인간만이 인간일 수 있었을 땝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건축이 이때 등장합니다. 성베레모 사원이 등장합니다. 굉장히 으리으리합니다. 돔이 있는 곳이 핵심입니다. 교황이 있던 곳이라서 교황을 위한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이 르네상스는 서양 건축의 가장 중요한 지류가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팔라디오가 설계한 건물입니다. 9개의 사각형을 만들고, 가운데 중요한 거처를 둥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로텐더 홀이라고 칭했습니다.
건물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기도 합니다. 그 벽면에 신들을 그려놓았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인식을 주는 거죠. 이 르네상스 시대 때 지었던 평면개념이 현대 건축가들에게 그대로 내려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나인 스퀘어 콘셉트(9개의 사각형) 양식입니다.
알베르토 캄포바예스라고 하는 건축가의 집을 보죠. 600년 전의 건축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겁니다. 외부와 유리되게 지었습니다. 30년이 지난 2022년에 로톤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마드리드에 새로운 집을 지었습니다. 판옵티콘적인 집을 지어서 전통적인 관념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미학’입니다. 비례, 재질, 스타일에 관한 것이죠. 주로 외형적인 요소가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반면에 16세기에 조선에선 어떤 집이 지어졌을까요. 보죠. 그래야 서로의 생각을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동락당을 비교해 보죠. 동락당은 조선의 대성리학자 집인데요. 이 성리학자가 정쟁에 휘말려서 파직을 당하고 고향 땅인 양동마을로 돌아옵니다. 경주 안강에 있는 집을 개조해서 짓습니다. 이 집을 가보면 굉장히 낮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담장도 낮고 건물도 낮습니다. 땅으로 꺼질 것만 같습니다. 참 특이합니다.
원래 건축법은 주변의 산세를 다 자신의 경계로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실제 땅은 400평 정도에 불과하지만, 산세가 보이는 시각은 굉장히 넓게 펼쳐져서 그 중심에 거하겠다는 겁니다.
사랑채는 하인을 내려다보기 위해 높게 짓는 게 일반적입니다. 여기는 거의 마당 레벨과 같습니다. 실제로 마루에 앉아 보면 타인이 오히려 주인을 내려다보는 공간 구조입니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요? 의문이 들기 시작하죠. 이곳저곳에 이런 류의 마당이 많습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사당도 있습니다. 조상을 모시는 거죠. 보통 사당은 올려놓아야 하는데, 올리지 않고 같은 레벨로 만들고 그 사이에 중간 공간을 하나 두어서 거치고 들어가게 하는 걸로 경건하게 만듭니다. 철저히 ‘마당적’인 건축입니다.
이건 동락당을 그린 도면인데요. 현대 건축학자가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제가 추측하기엔 당시 도면은 이것과 달랐을 겁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공간들을 아주 간소하게만 휙휙 그렸을 겁니다. 그러면 목수가 알아서 툇마루나 미닫이 문을 만듭니다. 즉 목수는 실질적인 건축을 하고, 회재는 건축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며, 마당과 공간을 형성하는 도면을 그리는 겁니다. 회재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면, 앞의 공간을 넘어, 저 너머의 공간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설계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비단 동락당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었지, 집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는 선조의 지혜입니다. 이런 걸 우리는 관계의 집 혹은 윤리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윤리로 집을 만들었습니다.
건축 비엔날레에서 매년 새로운 표지를 내 거는데요. 2000년에 ‘미학보다는 윤리’라는 표제를 내걸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내건 표어입니다. 이제는 윤리로 나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건축이 더 이상 미학이 아니라 윤리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21세기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한 겁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윤리 규범을 다 내벗어 버리고, 미학이 옳다면서 살아왔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학이 아니라며 윤리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었죠.
건축은 도대체 뭘까요. 건축은 일본인들이 원시시대에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집안을 만든다는 말로 설명이 안 돼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게 건축입니다.
저는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울 건’과 ‘쌓을 축’이니까, 행위로밖에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조가’라는 말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원래는 ‘영조’라고 씁니다. 조선시대까지 ‘가꿀 영’, ‘만들 조’라고 썼습니다. 영어로는 아키텍처라고도 하죠. 아트와 텍톤이라는 말이 합쳐진 겁니다. 뭔가를 이루어서 만들다는 게 텍톤입니다. 그래서 가장 으뜸이 되는 학문이 아키텍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은 건축가가 대단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단어 자체가 뭘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해요.
대신, 우리 말로는 잘 표현됩니다. 바로 ‘짓다’라는 단어입니다. 글, 밥, 집을 ‘짓’죠. 질료나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이념을 넣어서 솜씨를 빌려 전혀 다른 형태로 창조해 냅니다. 그래서 건축은 사유 과정을 통한 행위라고 볼 수 있죠. 처칠은 그래서 ‘우리는 건축을 만들지만,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믿습니다.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이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살면서 적응하고, 행동에 따라 습관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서 결국 얼굴까지 바뀌는 겁니다. 수도승이 왜 자연으로 들어갈까요. 그 ‘공간이 자기를 번뇌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건축은 다른 사람의 삶을 좋게 만들기 위한 작업입니다. 저는 건축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나쁜 삶을 살게 될까 주저합니다. 저는 일필휘지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삶을 악하게 만들까 봐 늘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말이 ‘빈자의 미학’입니다. 한국 현대건축을 정립한 김수근 선생님 밑에서 15년을 수련하고,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에 남긴 공간을 이어받아 작업했습니다.
1989년에 제 건축을 하기 위해 독립했습니다. 그동안 15년간 그분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 건축을 이제 해야 할 때였는데요. 금호동 달동네를 거닐다가 제 어릴 적 고향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피난민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떤 공간에 사는지 잘 압니다. 제가 오래전에 살던 동네가 기억나서, 제가 누구보다 작업을 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작아서 마당을 나누며 삽니다. 그 공간 구조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게 건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더 나아가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건축이어야 합니다. 맨 처음에 빈자의 미학을 내놓을 때, 공간과 기능, 형태 등등을 얘기했습니다. 지난 30년간 기억과 영생에 관한 항목을 추가했습니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책을 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아냥댔습니다. 지금까지 이걸 이어오고 있는데요. 제 지난 건축의 여정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빈자의 미학’ 실천 항목이 공간에 관한 것입니다. 본질을 ‘채워진 것’이 아니라 ‘불확정적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계시는데요. 옛집을 한번 기억해 보시면, 마당은 항상 비워져 있었습니다. 마당에서 놀아도 되고, 일해도 되고, 밥을 해도 되고, 잔치를 해도 되고, 제사를 지내도 됩니다. 대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비움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지난 60년대 이후에 이 마당을 전부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빈자의 미학’이라는 책을 쓰면서 기획했던 ‘수백당’이라는 집인데요. 이게 유홍준 교수님의 집입니다. 그땐 유 교수님이 돈이 없었습니다(웃음). 그래서 ‘원래 사는 집을 고쳐서 짓고 싶다’고 ‘그거에 맞춰서 설계를 해달라’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 ‘싸게 지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웃음).
그 동네가 신사동에 있는데요. 여기를 강남에서 가장 처음 주택지역으로 개발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냐면, 60년대 유행했던 노래 아시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가 히트 칠 때였습니다. 남진 노래요. 집만 지으면 푸른 초원을 깔고, ‘내 님과 함께 잘 살고 싶어’서 벽을 칩니다.
이렇게 옛집과 달리 ‘동떨어진 삶’을 살기 시작한 게 프랑스식 집이라고 으스대며 집을 지어댔습니다. 그래서 전 이와 달리, 불과 70평 정도 되는 땅에 마당을 3개 놓고, 집을 가능하면 떨어뜨려 놨습니다. 30년 동안 도시 형태가 발전해서 집들은 다 떠나가고, 땅값이 굉장히 많이 올랐습니다(웃음). 유홍준 교수님은 자기가 뱉은 말도 있으시고, 뭐 떠나가지 않고 계속 거기에 살고 계십니다.
밖에서 보면 문도 반투명으로 만들었고요. 바깥마당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면 안 마당이 있습니다. 이걸 거실과 통합시켜 놨습니다. 적어도 이 3개의 공간이 풍부해 보이도록 지었습니다.
이걸로 저는 굉장히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1970년에 건축상이란 상은 다 받았고, 모든 언론에 게재됐습니다. 그만큼 이런 류의 집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공간 감각을 일깨워줬던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공간감이 하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사는 집의 방 이름을 기억해 보죠. 안방, 건넛방, 문간방 이렇게 ‘위치’에 따라 불렀습니다. 이제는 거실, 침실, 욕실 등 그 ‘목적’에 따라 부릅니다. 거실에 소파, 식당엔 식탁이 놓여 있습니다. 옛날 방엔 가구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구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잠자고 싶으면 요 깔고, 밤에는 화투치고요(웃음).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객체적으로 삽니다. 우리가 과연 올바른 삶을 살고 있을까 질문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수백당을 지으면서 15~30m 사이 12개의 공간에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빈자의 미학’ 실천항목 두 번째는 ‘기능’입니다. 기능이 갖는 문제점이 참 많습니다. 아파트가 가장 기능적인 집입니다. 가장 동선이 짧은 건축입니다. 차에서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가면 옆집을 모릅니다. 집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집 안에서도 서로 방문을 닫으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엔 우리가 집에서 떨어져 있어도 서로 뭘 하는지 우리는 상상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문을 두드리면 나가서 맞아주는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워서 리모컨으로 모두 컨트롤합니다. 우리만의 공간이 점점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불편한 집에 사는 걸 반기능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퇴촌에 집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설계할 때, 방들을 전부 떨어뜨려 놨습니다. 방끼리 가려면 신발 바꿔 신고 가야 합니다(웃음). 가급적이면 방과 방 사이를 붙이지 않고, 움직이도록 만들어놨습니다. 그러면 이 집을 지나갈 때 방과 방 사이는 바깥 풍경을 보고 서로 가족을 확인하도록 합니다. 반기능이 가지는 근사한 점이죠.
빈자의 미학 세 번째 실천 항목은 ‘형태’에 관한 지점입니다. 공간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겁니다. 저는 벽, 천장, 바닥은 공간을 형성하기 위한 부차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본질이 있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시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그 벽채를 과장되게 만들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돋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건축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지금과 정반대여야 합니다. 건축은 침묵하는 형태가 가장 올바른 형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는 대학로에 어떤 박물관을 하나 지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표정이 없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는 빛이 들어와서 굉장히 화려하죠.
네 번째 빈자의 미학 실천 과제는 ‘도시’입니다.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죠. 우리나라에서 유독 아파트가 단절적입니다. 아파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빙 둘러가야 합니다. 아파트 내부는 법규를 적용할 수도 없는 개인적인 땅입니다.
그렇게 아파트는 크든 작든 ‘섬’이 됩니다. 서로 대립하듯이 서 있는 대결의 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아파트가 아닌 집들도 가만 보면, 비가 오는데 지나가는 행인은 비를 피하고 싶어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자기 땅을 강조하기 위해서 막고 배척합니다. 이게 건강한 건축과 도시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건강한 도시를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중국에서 많은 일을 했는데요. 그중 하나가 베이징에 있는 ‘차오웨이 소호’라고 하는 곳을 의뢰받아서 일했습니다. 원래 건축주는 개발을 원했습니다. 땅이 6천 평이라서, 한 건물로 블록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려서 ‘작은 국경’처럼 만들었습니다. 사통팔달할 수 있는 골목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건축물 정 가운데 기다란 광장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광장에 외부사람들도 감시받지 않고, 제어받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방방곡곡에 있는 길들이 문을 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도시가 된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치 진짜 도시처럼 변했습니다.
이게 건축이 가져야 할 도시에 관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도시에 요구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빈자의 미학에 대한 우리의 과제는 ‘기억’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유물에 환호하는 까닭이 발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통해 옛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죠. 양피지가 귀한 시절에 거기에 글씨를 쓰고, 지워지면 그 위에 또 덧입혀 씁니다.
건축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은 제가 몇 번 강조하지만, ‘땅 위’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터무니라는 말을 아시나요. 우리의 근거와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정체성을 터와 무늬에서 찾았습니다.
우리가 아파트를 어떻게 짓나요. 수없이 많은 터무니를 세우죠. 아, 터무니없는 삶을 사는 분들도 많죠(웃음)?
모든 터는 다 다릅니다. 자연이 새긴 역사가 있고, 살면서 새긴 역사가 서로 따로 동떨어져 있습니다. 모두 따로 있는 겁니다.
새로운 무늬를 덧대야 합니다. 그게 일입니다. 지난 세월의 터를 다 지우면 터무니없는 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모든 건축은 땅이 결정합니다. 저는 땅을 보기 전에는 어떠한 이미지나 해답을 가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땅을 본 순간 그 땅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줍니다. 땅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터무니고, 그걸 지문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사는 대학로에 집을 지었던 또 다른 경우입니다. 이곳은 오랫동안 봤지만, 꽃집으로 막혀 있어서 언젠간 허물어질(재개발될) 집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곳을 제게 의뢰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들어가 보니까, 이거 이거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집인데, 당시 교수들 관사 중 하나였습니다. 터가 매우 좋았습니다. 더구나 저를 가르쳐주셨던 분이 여기에 이어 살기도 했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이 집을 제가 허물어야 하는 겁니다. 지하를 파고 새로 지어야 하니까 허물어지는 게 당연하죠. 제가 이걸 ‘죄스러워서 못 짓겠다’고 하면, 다른 건축가가 할 거였습니다. 이 건물을 그대로 복원했습니다.
이 집은 지금 1층이 빵집으로 쓰입니다. 근데 들어가 보면 옛날 모습이 남아있어요. 손님들은 ‘인테리어를 참 이상하게 해 놨다’고 생각하겠죠(웃음).
제주 애월 아시죠. 아주 서정적인 지명입니다. 여기 4천 평 정도 되는 대지의 리조트 호텔을 짓고 싶다고 부탁이 왔습니다. 가보니까 놀랍게도 50그루의 해송이 울창하게 있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호텔을 지으려면 이 나무들을 다 베어내야 합니다. 이걸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나무 한 그루 한그루에 다 인사하고 ‘반드시 살리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전체 도면을 그렸습니다. 나무의 영역을 정하고, 그 영역을 ‘마당화’시키기 위해 이걸 다 길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건축을 했습니다. 철저히 소나무가 주인이 된 집 채 24개를 그렸습니다.
집의 이름은 소나무 개수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일송재, 이송재 등등이요. 소나무가 없다? 그러면 무송재(웃음). 어쨌든 공사를 시작해서 다음 달이면 완공이 될 겁니다. 여기는 보면 소나무가 주인이 된 집입니다. 소나무가 지배해 왔던 이 땅을 다시 소나무의 공간으로 지속시키기 위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집주인이 자기 친척들과 같이 살고 살기 위한 집을 짓고 싶었다고 했는데요. 이게 개인의 소유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바꾸어서 중간에 리조트 호텔로 바꾸겠다고 결심합니다. 음.. 여러분들도 쓰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웃음).
이끼가 낀 돌들도 가져왔고, 10m 높이 언덕에 종도 두었고요. 하루 종일 거주하면서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의 공간으로 삼기 위한 공간도 따로 두었습니다.
마지막 빈자의 미학을 위한 실천항목이 ‘영성’에 관한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40분마다 1 사람씩 절망하여 자살하는 사회입니다. 물질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너머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집에 굉장히 많은 터줏대감 같은 신이 있었습니다. 마루에는 성주신, 부엌에는 주왕신이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변소에도 신이 산다고 믿었습니다. 문턱을 건널 때마다 문신이 산다고 해서 항상 조심하면서 살았습니다. 큰집에는 사당을 안에 뒀고요.
이게 없어진 게 경제개발을 하면서부터입니다. 부동산 가치 때문에 이 모든 걸 없어지게 만든 겁니다. 수백, 수천 년간 이어오던 게 졸지에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 영성을 다시 건축을 통해 회복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종교 시설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시설에서 구현하기 시작한 겁니다.
얼마 전에 지은 청계천변 숭인동 오피스텔입니다. 이 주상복합에 1천 세대 정도가 사는데요. 이것도 작은 마을이라고 볼 수 있죠. 보면 마당, 도로, 공원도 있습니다.
이 오피스텔 입구에 신당 같은 조형물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적 마을에도 신당이 있었죠. 마을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그 생각이 나서 입구에 아주 작은 집을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절망에 처했을 혹시 이곳에 와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은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었습니다. 쓸데없는 시설을 하나 뒀습니다(웃음).
제가 장미희라는 영화배우 집을 설계했습니다. 1970년대 서교동 집에 사셨는데, 주변이 다 상업시설로 변해서 그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집이었습니다. 대 배우가 살았던 집에서 상업시설로 바뀌는 것을 말리면서 거기를 기념관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결국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벽을 인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집의 내부를 보면, 제가 설계한 가구를 다 넣어놨습니다.
여기 사각뿔의 형태가 보이실 텐데요. 이게 전시실 내부입니다. 2층 높이를 그냥 뚫어놨습니다. 경사 벽면에 물병자리를 구획해서 그 별자리대로 구멍을 뚫었습니다. 완공될 때쯤 장미희 씨가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리곤 여기를 자기 죽음의 장소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잽싸게 납골함까지 만들어서 넣어드렸습니다(웃음).
장미희 배우는 완공된 후, 매일 자기가 죽은 후의 공간모습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 분의 삶이 전과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무덤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까요. 저는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디언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무덤 앞에 와서 울지 마십시오.’ 저는 무덤이 산 자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동산 때문에 무덤을 우리들의 공간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어제 기항지 오키나와에서 공동묘지를 발견했습니다. 주거지 그리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일본 나하 주민들은 여기에 묻힌 채로 사는 겁니다. 일반적인 집의 형태와 무덤의 형태가 거의 똑같습니다. 저는 무덤 여행 하기를 좋아하는데요. 그 무덤의 건축이 그 지역의 원래 건축을 알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덤이 옆에 있다면, 주민들은 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늘 생각하면서 살 겁니다.
제게도 무덤 설계가 들어왔습니다. 귀신도 싫어할 음슴한 공간이었습니다(웃음). 공동묘지를 설계해 달라고 해서 제가 이렇게 바꾸어놓았습니다.
여기엔 마당도 있고 광장도 있습니다. 밤이면 귀신들이 나와서 마을 회의에 함께 참여할 수도 있겠죠(웃음). 공동묘지인데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러 옵니다. 이 마을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찾아옵니다. 식당도 잘 된다고 합니다.
저는 죽은 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을 설계했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당시에 ‘작은 비석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한 유언이 있었습니다. 당시 묘역을 만들기 위한 위원장이 유홍준 교수였고요. 2010년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자기를 추방하고, 세상의 경계밖을 향하신 분’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대통령답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관습을 등졌던 사람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런 무덤을 설계했고, 기념관도 설계했습니다. 작은 경사진 땅처럼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하나 냈습니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이라고 제목을 지었습니다. ‘스스로 추방된 자’라는 제목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팔레스타인계 문학평론가가 한 말입니다. 이 사람이 <권력과 지성인>이라는 책을 내면서 “지식인은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추방해서 경계 안에 있는 현상을 관찰하고 대안을 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경계 밖은 춥고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고통스럽죠. 그렇지만 그 고통을 견뎌야 지식인입니다.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유태계 철학자가 하나 있습니다. 나치가 추적을 해오자 몸을 피하다가 다량의 모르핀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여기는 그 사람이 묻힌 묘지입니다. 이 사람은 건축과 도시에 대해 많은 글을 썼기 때문에 제 젊은 시절에도 많은 자양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유태인 조각가 하나가 이 사람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기념비 아래엔 철제 깡통이 박혀 있는데요. 지중해로 이어지는 위태로운 장면을 연출해 놨습니다. 밖에서 보면 땅을 관통하고 위태롭게 내려갑니다. 지식인은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거기서 위험한 순간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겁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노트르담 성당이 굉장히 크죠. 관광객이 많습니다. 최근에 불이 나서 다시 복원을 했습니다. 이 성당을 왼쪽으로 끼고 150m를 가면 센강 끝에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낮은 담장에 가까이 가보면 글귀가 써져 있습니다. “추방당한 프랑스의 순교자”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는 나치 시절에 20만 명의 프랑스 유태인을 기념하는 전쟁 기념관입니다. 입구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4m 높이의 벽이 있습니다. 여기만 가도 굉장히 조용해지는데요. 추방당한 유태인의 이름이 쭉 쓰여있습니다. 마치 홀로 된 듯한 모습입니다. 이게 추방당한 자의 공간이라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추방당하는 건 주로 종교시설입니다. 특히 기독교 교회는 ‘에클레시아’가 어원인데요. 원래는 ‘부름을 받아 모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스스로 추방당한 사람들’ 이게 에클레시아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게 교회 예배당입니다. 그런 공간이라면 당연히 단순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공간이어야 하죠.
요즘 교회당은 ‘쇼 무대’처럼 변했습니다. 상업시설보다 더한 공간이 됐습니다. 교회 공간을 한사코 거절하다가 경산 ‘무학로 교회’ 이상한 목사 하나가, 제 마음대로 설계를 해보라고 해서 15평짜리 교회를 설계했습니다. 어떤 독지가가 벽돌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는데, 바닥 천정, 내부 가구까지 다 벽돌을 쌓아놓은 겁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도망쳤지만요(웃음).
굉장히 단순하게 지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건물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단순하고 명료한 공간이 주는 신비로움 때문입니다. 명료함보다 신비로운 게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스스로 추방당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순교자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스스로를 영원히 추방시킨 사람들 말입니다. 병인박해 때 4천 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습니다. 이건 세계적으로 희귀한 역사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신속복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봉하마을 위, ‘명례’라는 곳에서 소금 장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한 신부님이 신속복 생가터를 성지화하기 위해 제게 설계를 부탁합니다. 7천 평을 성지화시키기로 했는데요. 지금은 1단계입니다.
아.. 앞부분에 하도 말을 많이 했네요(웃음). 속도를 조금 높이겠습니다.
자, 순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하기 어렵죠. 자기 목숨을 차마 버리기 힘드니까 세상적인 가치를 버리는 방법이 ‘수도’입니다.
수도는 3가지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육체, 물질, 정신입니다. 가족도, 돈도, 번뇌를 버려야 합니다. 항상 청빈해야 합니다. 그게 베네딕트라는 수도사가 규칙서를 만들었는데요. 우리가 아는 모든 수도원들이 이 규칙을 바탕으로 합니다.
‘닦을 수’에 ‘길 도’가 수도입니다. 골방에 앉아 있는 게 수도가 아닙니다. 고통을 만들면서 이루는 게 수도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수도자의 길을 걷지 못하고 겸허할 따름입니다.
수도자들이 얻고자 하는 건 평화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평은 한자가 원 의미와 좀 다릅니다. 평은 ‘평형’ 이른바 ‘밸런스’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좀 위험하죠.
영어의 Peace는 동사형으로, ‘남을 정벌해서 무력으로 얻는 게’ 피스의 원래 뜻입니다. ‘팍스 로마나’ 힘에 의한 평화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을 갖고 있다는 신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오는 평화가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그런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나라에 굉장히 중요한 수도원 하나가 있습니다. 왜관수도원입니다. 제가 국내에 아는 수도원을 돌아보고 쓴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자 ‘외부 사람들이 와서 수도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해 달라’는 의뢰가 왔습니다.
이름은 ‘피정’이었습니다. 벽 옆으로 슬슬 기어나가는 게 ‘피’입니다. ‘정’은 아주 기묘합니다. ‘고요할 정’은 그냥 얻는 게 아니라 싸운 다음에 옥죄는 투쟁을 통해 얻은 푸르름입니다. 그게 ‘정’입니다.
즉, 피정은 ‘자신을 경계 밖으로 보내서 자신의 몸이 싸워서 얻는 평화’라는 뜻이니까 굉장히 어마어마한 뜻입니다. 영어로 피정은 ‘리트릿 센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에선 피정이지만, 불교에서는 템플스테이가 똑같은 말이겠죠.
피정에서는 80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도 있고요. 전부 독방입니다. 저는 “부부가 와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웃음). 그래서 2인실을 만들었습니다. 그 한 층을 제외한 모든 방은 독방입니다.
‘사유원’에 대한 건 짧게만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나무를 좋아한 어느 기업의 회장님이 수목원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유와 명상을 위한 건축’을 하자고 얘기했는데요. 그 자리에서 이름을 ‘사유원이라고 합시다’라고 정했습니다.
이름이 정해진다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이름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이 처음 받은 능력이 성경에 따르면 사물의 이름을 정하는 거였습니다.
어쨌든 그 이름에 따라 나머지가 다 정해졌습니다. 땅은 15만 평 정도 되는데요. 그 땅을 넘어 수백만 평의 땅이 보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자연에 집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자연과 연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집이 두드러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여기는 함부르크 밑에 있는 도시입니다. 유태인 조각가가 세운 탑이 있습니다. 15m짜리 단순한 탑입니다. 그런데 이 탑은 매년 2m씩 땅으로 꺼집니다.
이 탑 앞에 있는 게시판에 보면 ‘나치에게 당했던 기억들을 써달라’고 해놨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시민들이 나치에게 당했던 분노, 슬픔들을 탑 표면에 기록합니다. 낙서처럼 기록했고, 1993년에 마침내 완벽하게 땅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저 인공적인 기념탑엔 진실이 없다는 게 핵심입니다. ‘기억이 가장 큰 진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기억 속에 있지, 인공적인 시설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죠. 지금은 터만 남아있습니다.
모든 건축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구적일 수 없습니다. 사라집니다. 아무리 강하고 권세 있는 자를 위해서 지었더라도 건축은 반드시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그 건축 속에 진실이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았던 기억만이 가장 진실합니다. 아도르노가 ‘역사적 기억이 없으면, 그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