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희 영화감독
"나아갈 힘만 있으면 됩니다. 그게 복입니다."
김초희 감독의 인생에서 나아갈 힘은 '영화'였다. 훨훨 날아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해도, 9년간 카메라 한번 잡지 못한 사람이 실제로 영화를 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으랴.
게다가 이른바 '역대급 영화계 스캔들'의 한복판에서, 홍상수의 배신을 꿋꿋하게 이겨낸 '해피 초희'는 이제 막 출발선을 넘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를 담담하게 전하는 모습은 마치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도는 탐험가 같았다. '갈 거야. 닿을 거야. 할 수 있어.' 강인한 전진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삶의 업보처럼 가닿은 작품이 바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이제 김초희는 어엿한 감독이다. 보는 내가 다 뿌듯할만큼, 계속해서 나아가는 '찬실이의 걸음걸이'만큼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힘을 아는 감독, 김초희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씨네 토크다.
안녕하세요. 이 영화를 만든 김초희라고 합니다. 어제 은희경 선생님 강연을 들었는데요. 선생님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저는 없네요(웃음). 아, 의자가 왔네요.
감사하게도 이 영화를 재밌게 봐주신 분들이 많은데요. 또 어떤 분들은 ‘좀 지루하고 어렵다, 뭐지?’ 하는 분들도 다양하게 앉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요. 각자의 느낌은 다 다른 거니까요.
우선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를 봐야 합니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달리 제작비, 제작 규모 등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쉽게 말하자면 독립영화입니다. 킬링타임으로 보는 것과는 정반대 대척점에 있습니다. 기존의 영화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루할 때 보는 킬링타임 영화는 장르적이라는 관습적인 틀이 존재합니다. 그걸 보다 보면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떻게 영화가 흘러갈지 예상도 되고, 매 순간 카타르시스를 전달해주는데요.
하지만 제 영화는 지루하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상황이 많습니다. 목적성이 다릅니다. 투입된 제작비 대비 이익을 보겠다는 목적이 있습니다. 물건을 팔 때도 이윤이 남아야 팔잖아요. 그냥 팔 순 없으니까요. 독립영화는 적은 제작비로 자기의 생각이나 관객들의 공감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어렵게 만들어진 영화거든요.
이 영화엔 제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습니다. 이 영화의 탄생을 얘기하면서 ‘진정한 복’이 뭔지 윤곽을 잡아갈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어떻게 제게 복인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1975년생이고요. 23살에 영화감독을 꿈꿨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다가 46살에 데뷔를 했는데요. 23살에 점쟁이가(신봉하지는 않았습니다) 46살에 데뷔할 거라고 했다면 전 영화감독을 안 했을 것 같습니다. 전 금방이라도 영화감독을 할 것만 같았습니다.
꿈을 꾼 계기는 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마음의 구멍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걸 메꾸고 싶은 욕망이 생겼는데요. 방황을 많이 하는 거친 소녀였습니다. 막연한 소설가를 꿈꿨습니다. 그 이유는 저를 표현하는 건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답답한 속을 드러내서 공감, 위로를 받고 싶었나봐요. 이게 농익지 않은 꿈이고 준비가 너무 안 됐다보니까 그 꿈을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한 1년 정도 습작 시간을 가졌는데, 밤새 열심히 쓴 글을 보여주면 친구가 ‘너는 글은 좀 쓰는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거에요. 그 말이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어요. 나는 그 누구도 베끼지 않았는데요. 삭발이라도 해서 저만의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만 쓸 수 있는 스타일의 글을 쓰고 싶어서 삭발을 계획했습니다. 제가 그 때 딱 4천원 밖에 없었는데, 제가 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나빠서 돈을 일절 벌리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는데, 6천 원이라는 거에요. 2천원이 모자라서, 근처 아버지 작업실에 가서 2천 원을 빌리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나전칠기를 만드시는 분이었는데요. 제게 “왜?” 라고 물어보셔서 “대가리를 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려면 나가 죽으라”고 하더라고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습니다.
그 2천 원을 못 빌리고, 대학시절 알바를 하던 비디오 가게로 가서 돈을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비디오 가게에서 짤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삭발을 못했습니다.
소설가의 꿈도 그때 과감히 접었습니다. 또다시 하염없이 방황을 했습니다. 하염없이 영화만 봤습니다. 영화를 좋아는 했는데요. 정말 백수처럼 영화를 본다고 하잖아요. 하염없이 영화만 보는 겁니다. 술 마시고 영화 보고, 술 마시고 영화 보고.
그러다 머지 않아서 제 눈에 들어오는 영화가 하나 있었는데요.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저를 각성시키는 영화가 하나 들어옵니다. 영화에도 나왔었던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엔 말 그대로 ‘집시의 시간’이 나오는데요. 거기 불행한 남자 주인공 페드로가 나옵니다. 그 친구가 꼭 저 같았습니다. 불행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요. 결국 하늘을 날더라고요. 그때 영화감독을 꿈꿨습니다. 한껏 드러내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그때가 23살입니다.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영화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제가 단편영화 워크숍 수강생이 된 게 제 영화 인생의 시작입니다. 드디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체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3조 워크샵 수강생이었는데요. 1조에 10명 정도였어요. 1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 그 워크샵이 끝납니다. 거기서 시나리오를 다 써서 다수결 투표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잘 쓴 걸로 영화를 만드는 건데요. 그러면 그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감독, 나머지는 다 스탭이 되는 겁니다. 다들 감독이 되고 싶어했겠죠. 저는 3순위로 꼽혔고, 스탭이 됐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감독이 안 되니까 음향, 촬영 감독 등을 원하더라고요. 영화를 사랑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저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은 제가 스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요. 제작부는 사람들이 굉장히 꺼려 합니다. 허드렛일이 많아요. 잡무가 많아서 제가 먼저 자원해서 제작부가 됐습니다.
그때 제가 조금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합니다. 저는 약간 반골 기질이 있어서요(웃음). 멋있어 보이고 신념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때 그 마음이 제가 영화감독을 하는 데 너무 많은 우회를 하게 만든 첫 번째 길로 접어든 순간이었습니다.
‘이것도 괜찮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많은 현장 스탭들이 그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막상 영화가 개봉하면 감독이나 배우를 기억할 뿐입니다. 그래도 무수한 영상 산업에 뛰어드는 종사자들은 ‘얼마나 그 일을 좋아하며, 빛나지 않은 그 일에 목을 매는가’라는 걸 이 자리를 빌려서 생각해주시면 너무 고맙겠습니다(박수).
저는 이런 스탭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영화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 가지 길이 있었는데요. 서울로 유학을 가는 게 첫 번째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영화과에 들어가거나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가서 감독이 되는 전문적인 코스를 밟는 게 하나 있었고요. 또 다른 하나는 유학을 가는 거였습니다.
제가 전공이 불어인데요. 저는 늘 언제나 깊게 알지 못해서, 엉뚱한 선택을 할 때가 많아요(웃음). 전공은 불어였는데, 재미없게 대학을 다녔습니다. 참으로 깊지 못한 이유 하나로 인해 저돌적인 방식으로 아르바이트를 3개 정도합니다. 그리곤 집에 선포했습니다. ‘내가 지금 1천만 원짜리 적금을 넣었는데, 만기가 되면 프랑스로 떠나겠다.’ 뭐 ‘니 맘대로 해라’라고 부모님이 하셨어요. 저는 부모님의 반대라는 어려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딱 1년 만에 적금 만기 1천만 원을 들고 911테러가 나는 그날, 2001년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들어갔습니다. 총을 든 무장 군인이 쫙 깔렸더라고요. 프랑스는 공항에 총을 든 군인이 많네? 신기하다 싶었어요. 집에와서 TV를 보니까 테러 소식이 나오더라고요. 역시 프랑스는 영화의 나라다(웃음). TV에서 생생하게 막 이런 장면을 틀어주는구나 싶었죠. 근데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집에서 난리가 났죠. 전 괜찮았어요(웃음).
공부를 하면서 돈을 벌고, 유학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무작정 유학을 왔는데 녹록지 않은 거에요. 되게 고생을 많이 했고요. 고생의 수준이 한국과 달랐습니다. 유학을 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 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프랑스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 나라더라고요. 스페인이나 브라질 친구가 훨씬 좋았는데, 프랑스 친구들은 성향이 너무 달라서 그냥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비장한 각오로 프랑스에 왔어요. 떠날 때 친구들이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웃음). 다 유학을 가면 성공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위에 그런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요. 비행기만 타면 성공할 것 같았나봐요. 친구들이 눈에 밟혀서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웃음).
‘졸업장이라도 하나 따자’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갈 명분을 만들려고 했어요. 2년 정도 어학하고 준비를 해서 파리 1대학에 갔는데요. 그 학교는 ‘영화 이론’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영화 감독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었고요. 학비가 무료여서 그냥 들어갔습니다.
가서 이론 공부를 하는데,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갑갑했어요. 어느새 29살이 되었거든요. 23살부터 29살까지 카메라도 만지지 못하고 영화를 찍지도 못하니까 갈증이 너무 심한 겁니다. 나는 하루빨리 현장에 가서 사람들과 같이 으쌰으쌰하면서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아직도 영화를 보면서 분석하는 제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더라고요.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봐서 겁은 없었어요. 학교는 다니되, 돈도 벌고, 그냥 내가 영화 찍어야지 하면서 알바비를 모아서 카메라와 조명을 샀습니다.
파리에서 3개 정도의 단편영화를 찍게 되는데요. 카메라만 제 손에 있다면, 1년에 영화 100편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근데 영화가..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인건비는 고사하고 밥 먹을 돈도 녹록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한정적인거에요. 결국 자기 아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기가 모르는 얘기를 하는 건 다른 차원이니까요.
이렇게 영화를 찍을 바에야 한국을 가야겠다 했어요. 석사를 막 끝내고, 졸업장을 땄으니까 한국에 가도 됐을 때였어요. 실제 찍어보니까 돈도 많이 들거니와,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고 영화를 찍은 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형편 없었습니다. 이건 긴급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영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이건... 제가 봐도 아닌 거에요(웃음).
영화는 여러 가지가 필요해요... 뭐.. 하여튼 복잡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파리에서 한국에 유명한 감독이 영화를 찍으러 오는데요. 프랑스어가 가능한 연출부를 뽑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 연출부를 하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석사가 끝나고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논문 쓸 때가 아니면 수업도 없고, 널널한 편이었거든요.
그게 홍상수 감독님 제작부였어요. 근데 돈을 안 준대요. 처음엔 거절했는데, 영화를 더 배우고 싶은 마음도 컸죠. 사실 그 마음이 더 크고 급했어요. 돈을 안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프랑스 현장 총괄 부장을 찾아가서 물어봤습니다. “돈을 안 준다고 해서 포기한 사람인데, 당신도 돈 안 받냐. 나는 견습생이니까 돈을 안 받는 거냐”라고 물어봤는데, 자기도 돈을 받기로 했대요. 예산이 줄어들고,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면서 돈을 안 받기로 했대요. 그래서 그럼 전 하겠다고 했습니다.
32살이었는데, 23살부터 9년이 지나서야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는 현장에 갔으니 제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설레고 좋았겠습니까. 제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은 다 잊어버렸고요. 엄청난 희열을 느끼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 그 때 제 삶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재미나게 일을 했었고요. 제 선택이 옳았습니다. 그 영화 만드는 현장은 제 길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행복했는데요.
파리에서 33일 동안 촬영을 했어요. 제가 맡은 임무는 연출부 중 미술 소품을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미술 감독이 따로 없고, 연출부에서 미술과 소품을 담당하는 특이한 구조였습니다. 이건 자랑인데요. 33일 동안 70만 원 정도 썼더라고요. 한국 분량 3회차 찍는데 70만 원 썼답니다(박수).
제가 수완이 있었던거죠. 제작부를 비롯해서 PD님까지 널리 소문이 난 겁니다. 희한한 애가 들어왔다고요. 보석 같은 아이다!(웃음) 홍상수 감독님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더 이상 영화투자를 받아 돈을 벌 수 없는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나만의 방식으로 독립영화를 제작하면서 만들어갈 예정이다. ‘영화사 살림을 해 나갈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나랑 같이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달콤한 제안이었죠.
너의 영화도 찍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저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에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한국에 돌아갔습니다. 파리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제가 결혼할 남자친구도 있었거든요. 그 친구도 버리고 갔습니다(웃음). 그니까 소위 말해서 파투 낸 거죠. 감독님의 제안에 눈이 멀어서 보따리를 싼 뒤, 한국에 들어왔죠.
들어와서 저는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실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이후에 PD를 답니다. 투자, 배급, 홍보가 영화의 시작부터 개봉까지의 과정인데요. 이걸 모두 제작사가 주관합니다.
제가 1부터 100까지 다 하는 제작사를 만드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당연히 첫 월급은 없었고요. 그 다음은 70만 원, 120만 원, 150만 원, 그리고 영화사가 안정될 때 마지막 월급이 200만 원이었습니다. 돈 생각 하지 않고,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사가 안정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몰빵’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참 아이러니한게요. ‘이제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이제 밥 벌어먹고 살겠다’ 싶을 때 위기가 닥쳤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위기는 늘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더라고요. 제가 존경하고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님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겁니다.
김민희 배우와요. 그게 왜 위기냐면, 그때 김민희 배우가 아가씨라는 영화의 주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CJ에서 날마다 전화가 왔고, 감독님 가족들을 포함해서 제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저를 앞세워서 뒤로 숨으신 분이거든요. ‘한 사람의 모자란 부분이 너무 크게 부각됐을 때 찾아오는 위기’이죠. 제가 그 때 감독님께 많이 실망했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기자들의 전화도 너무 많이 받았고요.
더 힘들었던 건, 영화 1편을 마치려면 엄청난 공정이 들어가는데요. 그 공정 하나하나마다 다 펑크가 났습니다. 업체 사람들에게 물어줘야 할 돈 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이 저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했어요.
제가 그래서 초강수를 둡니다. 제가 ‘그만둔다’고 하면 정신을 차릴 줄 알고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만둔다는 건 그 분이 영화를 못 만드는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처음엔 저를 붙잡으시더라고요. ‘1년간 유급휴가를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7년간 명절 없이 일만 했었거든요.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월급을 받으면서 1년간 휴가를 갈 수 있다니 너무너무 좋은 제안이잖아요? ‘본인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다 정리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행간에 떠도는 복잡한 소문도 무사히 잘 끝낼테니, 너는 쉬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제 밑 직원 2명에게 인수인계를 하게 됩니다. 돈이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하는지 등의 공정을 2명에게 한 달간 인수인계했어요. 그리고 캐나다에 1년의 유급휴가를 떠났는데요.
정확히 한 달 후에, 제가 사랑하던 직원 2명과 연락이 안 됩니다. 이메일 주소도 바뀌어 있고요. 정산할 수 있는 은행 거래도 다 바뀌어 있었습니다. 음.. 감독님에게 잘리게 된 거죠.
저는 캐나다에서 너무 힘들었고 죽고 싶었습니다. 방송국에 기회만 되면, 하나부터 열, 아니 100까지 다 알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를 살리러 온 배우가 있었습니다.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막 끝난 정유미 배우였습니다. 뒤풀이를 뒤로하고, 비행기 값 500만 원을 쏟아부어서 저를 살리러 몬트리올에 왔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다시 일깨워 준 친구입니다. 돌아가면서 용돈과 카드도 하나 주고 갔습니다. 다시 ‘해피 초희’가 되라고요.
그 때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영화가 나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는 게 뭐고, 인생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옆을 못 본 거죠. 당장의 책임을 감독님에게만 돌렸지만, 사실 그건 감독님 인생이고요. 내 인생은 내 인생이죠.
한국에 돌아와 ‘영화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때 벌써 20년이 지나있더라고요. 그런데 다행히도 제 옆에도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있었던 것처럼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저를 지지해준 배우와 스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더이상 홍상수 감독님의 PD가 아니었기 때문에 밀물 썰물 빠져나가듯이 싹 인맥이 갈라지더라고요. 제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영화가 이 영화입니다(박수).
공적 기금이라고 할까요. 시나리오를 써서 겨우 2억 2천만 원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위기를 극복할 때 얼마나 사람의 힘이 중요한지 정말 몸으로 체득하면서 배웠고요. 그러면서 인생에서 ‘복’이란 뭔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아갈 힘만 있으면 복이다’라는 것을요. 사실.. 이렇게 훈훈한 강연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요(웃음). 하나가 좋아지면, 열이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캐나다에 있으면서 죽고 싶었을 때, 제가 제일 먼저 한 게 밥 먹는 거, 씻는 거였거든요. 그걸 기본적으로 하니까 차츰차츰 좋아지더라고요. 여전히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저를 도와준 친구들을 여전히 가슴에 잘 챙기고 있고요. 저는 달라졌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말 그대로 인생입니다. 삶이요. 그 다음이 관계이고요. 그 다음이 일인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일이 앞으로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일을 다시 뒤로 보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운 좋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어서 제게 지난 5년간 정말 많고, 좋은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거절을 하고 딱 하나만 했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하고 싶지 않았고요. 그 많은 기회들을 놓친 걸 후회합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책할만큼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가 저한테 귀하게 와야, 제 인생 자체가 더 좋아진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여유는 휴식이 아닙니다. 어디 하나에 미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요. 하루를 귀하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선택한 걸 귀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선택이 결국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제가 믿고요.
제가 한 선택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절 살린다는 걸 믿습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nA
- 영화에서 자전적인 냄새가 많이 풍겼습니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진짜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지요.
= 우선, 허구와 진실의 경계는 아주 모호합니다. 모든 게 섞여 있습니다. 41살에 실직한 심정은 사실 진짜이고요. 김영이라는 친구를 좋아하는 모습은 불행히도 허구입니다(웃음).
제가 굉장히 오래 일하는 동안 애인이 없었던 건 사실입니다. 돌아보니까 제가 두고 온 청춘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제가 파리에 남자친구를 두고 온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연애를 오랫동안 못한 결핍을 좀 채우고 싶어서 허구로 만든 것이고요.
그리고 저는 ‘돈을 못 버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생존과 직결돼서 그게 몸에 깃든 사람입니다. 여배우 집에서 잠깐 정말 가사도우미를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도 허구는 아닙니다.
제가 처음 얘기하는 거에요. 제가 가사도우미를 했던 집이 정유미 씨의 집인데요. 정유미 씨의 성격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이렇지는 않아요(웃음). 영화는 허구와 사실이 섞여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배우는 제가 아는 여배우와 또다른 여배우의 특징들이 다 섞여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음 차기작을 정유미 배우와 찍거든요. 일단 그 영화 투자를 받아야 합니다. 이게 인생이.. 참 아이러니인데요. 제가 비록 정유미의 가사도우미를 자처해서 했지만요, 저는 감독이고 정유미는 배우잖아요? 이제는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습니다(웃음). 인생은 돌고 도는 물레방아다 싶습니다.
힘이 되는 말은 각자가 다 다른 것 같아요. 저를 일으킨 말은 이거였습니다. 소설 속에 있는 글귀였는데요. 제가 그 때 홍루몽이라는 책을 보게 됐거든요. 거기에 ‘소멸의 미학’을 담은 “세상의 모든 좋은 일은 그게 좋은 거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라는 말이 제 마음에 남았어요.
그때 저는 홍상수 감독님을 향한 미움이 제 마음에 가득 찼었기 때문에 그 불구덩이 같은 마음을 담고 제 일을 편안히 할 수 없었어요. 스스로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면 제 생각이나 시선이 다 바뀌어야 하는데요. 그걸 바꿀 수 있을만한 글귀였던 거죠.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도 인연이 끝이지만, 사는 동안에도 ‘사람의 인연이 닿을 때’가 있는 것 같거든요. 좋은 일도 얼마든지 있는데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잖아요. 그 글귀 하나가 마음에 와닿아서 그 글귀만 부여잡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 제가 지금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여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있습니다. 23살부터 영화 제작 현장 근처도 가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그 꿈을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 이건 좀 운이 따라줘야 할 것 같은데요. 상대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운이 별로 없었어요. 따뜻한 가정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 꿈을 절박하게 꿀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 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가 저를 살린 거에요. 이 길을 가면 나는 살 수 있다. 그거를 지키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가진 게 없으면 반대로 가진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차기작이 기대되는데, 저희가 뭐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 제 다음 차기작은 상업 영화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그만큼 저의 권한이 굉장히 축소됐습니다. 돈을 가진 자가 굉장한 큰 힘이 있잖아요.
저는 제 영화가 100% 투자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투자 난항을 겪고 있지만요. 좋은 기운을 받아서 배에서 내리는 순간 다 투자가 끝났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박수).
영화가 개봉이 되기까지의 여러 일정이 있습니다. 그 계획에 맞춰서 풀어가야 하기 때문에 다음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나 내용은 일단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요. 제 차기작이 재밌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재밌는 영화이고 싶은데 혹여 실망을 드리더라도 박수 쳐주시면 좋겠습니다.
- 영화에 장국영이 나오는데, 왜 장국영을 선택하셨는지. 왜 집에서 나오게 연출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진정한 복이란 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라고 하셨는데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가지는 평범한 감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저보다 10살 많은 고모가 있습니다. 주말마다 고모의 돈으로 각종 영화와 책을 대신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짜로 책을 보고 영화도 볼 수 있었는데요. 고모가 빌려놓은 영화들이 대부분 홍콩영화였습니다. 오락영화를 많이 봤는데요.
저도 장국영 미모에 반했고, 영웅본색에서 한 번 더 반했고요. 제 우상 같은 존재가 됐는데요. 나중에 커서 영화를 해야겠다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홍콩영화를 폄하할 때가 좀 있었어요. ‘인생에 고민거리를 던져주지 않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지적인 허영심이 들었을 때가 있었어요.
근데 벼락을 맞은 뒤로 그게 참 후진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싶었습니다. 내가 더이상 아무것도 없을 때, 내 영화 인생의 맨 앞줄에 누구를 앉힐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요. 장국영이었습니다. 장국영이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을 불러들였고요. 영화는 영화만이 말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한데요. 그런 판타지적인 인물로는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딱 짚어서 말씀드리겠습니까. 제가 흩뿌려놓은 여러 가지 중에 어떤 것이 관객들 마음에 와닿고, 저도 느끼고 제가 썼던 것처럼 느껴주신다면 그것만큼 감독에게 보람을 느끼는 건 없거든요. 하나의 메시지만 놓고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만들 뿐이죠.
- 본명이 아닌 김초희라는 가명을 쓰시는 이유는 뭔가요.
= 제가 PD로 활동할 때 썼던 이름은 다 ‘김경희’라고 돼있습니다. 25살에 저희 어머니가 제 이름이 평범해서 빛을 못 발한다고 바꿔오신 이름입니다. 어떤 점을 보는 분에게요.
그때부터 초희로 불리게 됐는데, 너무 바빴어요. 쉴 틈 없이 바빴고요. 굳이 개명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이름이 두 개가 되었는데요. 사실 지금은 경희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죠.
-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땐 모과 나무 장면이 있는데요. 왜 나왔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그리고 향후 작품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찬실이라는 이름의 뜻은 ‘빛날 찬’, ‘열매 실’입니다. 그동안 제가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자전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모과 장면은.. 제가 봐도 그 장면을 제일 모호하게 찍은 것 같아요. 전 모든 장면을 선명하게 찍으려고 했는데요. 그때 현장상황이 되게 나빴어요. 분장실장이 저희 조감독이랑 싸움이 나서, 자기들끼리 거의 머리 뜯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고요. 저한테 조감독의 사과를 요구하는 바람에 촬영장에서 잠시 혼돈이 왔습니다.
당연히 감독에게 그러면 안 되는데, 한낱 신인 감독에게 대신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였죠. 나중에 알고 봤더니 분장실장이 연출부 여자 아이를 혼냈고, 조감독이 그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분장 실장님께 욕을 했다가 벌어진 일이었거든요.
그때 외국인이 나왔던 이유는 ‘이제부터 깊게 깊게 나를 들여다봐야겠다’ 하는 장면의 포문을 여는 신입니다. 잘 보시면, 그 외국 아이가 찬실이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낯선 자기를 꺼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겠다’라는 선언 씬인데.. 그 난리가 나는 바람에 정신줄을 놓고 약간 모호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굉장히 평범하고, 그냥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입니다. 제 영화가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고요. 저처럼 위로받고 힘 받기를 꿈꿉니다. 그런 영화를 평생 만들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