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9일(일)
알람이 울린 시간은 여지없이 정확했습니다. 새벽 1시까지 낄낄거리다가 조금 후에 잠이 들었으니 6시간 정도 잤을 것이고, 그렇다면 얼추 피곤이 가셔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았습니다.
아침 풍경은 이제 거의 똑같아졌습니다. 뷔페식당에도 매일 나오는 사람들만 나옵니다. 전날 술을 많이 드셨거나, 파티를 즐기신 분들은 일찍 일어나기 어려우시겠죠. 그래서인지 청년이나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시니어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새로운 느낌입니다. 뭔가 '착실한 크루즈의 하루를 살고 있군!' 하는 느낌이 듭니다. 친구가 자랑스럽게 어제 사 온 대만 코카콜라를 꺼냅니다. 칙- 소리와 함께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탄산을 앞에 계신 어르신이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차마 ‘한 입 드릴까요?’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 야, 이걸로 장사하면 용돈 벌이는 할 것 같지 않음? 대만에서 캔 콜라 한 20캔 사서 들어와. 그리고 개당 한 3천 원씩 팔아. 4개 1만 원 막 이렇게 할인도 하고. 그러면 무조건 남겨 먹는 장사인거지.
- 어떻게 팔 건데? 방마다 찾아가서 방문판매 할 거야? 잡상인처럼?
-...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 되겠네.
밥을 먹은 뒤엔 9시부터 12시까지 쉬지 않고 강의가 이어집니다.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님과 은희경 소설가의 강연이 각각 1시간 30분씩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해야 했죠.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뷔페 줄은 여전히 길었습니다. 생각보다 맛있는 오렌지를 뜯으며 소소한 기쁨을 누릴 때쯤 찾아온 건 '공허함'이었습니다.
사흘 만에 찾아온 익숙함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크루즈의 위엄은 이제 당연해졌습니다. 심지어는 배가 조금 더 작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움직이는 동선이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밥 한번 먹으려면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 최소 3~4분은 쉴 새 없이 걸어야 합니다.
오후에 이어진 강의 역시 거의 쉴 틈 없이 이어졌습니다.
17시 반이 되어서야 강의가 끝이 났습니다. 약간 녹초가 된 채 방에 들어와 누웠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 오늘 강연 어땠냐.
- 유홍준 교수님 강의 장소에 사람이 너무 많던데?(사진 첨부)
- 그래서?
- 안 갔어.
- 음? 그럼 뭐 함?
- 핸드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습니다. 저는 심지어 밥을 먹고 난 다음에도 밖으로 나다녔습니다.
마지막 박준 시인의 강의까지 마무리되니까 20시를 넘겼습니다. 하루에 강의를 5개나 듣다니.. 대학 시절보다 빡세게 살았다는 생각에 약간의 피곤함과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친구가 박준 작가가 낸 시험문제를 풀었습니다. 전 거의 다 맞았는데, 얘는 33점을 맞았네요. 이른바 공능제(공감 능력 제로)입니다.
"넌 그게 문제야. 넌 진짜 쓰레기야. 진짜 바보냐?" 등을 연달아 내뱉습니다.
잠시 씻고 잠시 짐을 정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 7시에 곧바로 일본 오키나와에 내리니까요.
배는 생각보다 더 흔들렸고, 중간중간에 중심을 잡지 못하시는 분들도 더러 보였습니다.
오늘 밤에는 장사익 선생님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는데요. 그 큰 대극장이 다 찰정도로 이미 사람들이 미어터졌습니다. 그 공연마저 뒤에 겨우 서서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방에 돌아왔습니다. 그랜드마스터 클래스에서 이미 공연을 한 번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건강하셔야 하는데, 앞으로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을 것 같아 그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다른 분들의 전언에 의하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하셨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정말 일찍 자야지'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도 밤이 늦어집니다. 또다시 시작된 이른바 낄낄 시간.
아뿔싸, 이렇게 또다시 뜬 눈으로 날을 넘겼습니다.
오늘의 그린보트 꿀팁 3가지
1. 댄스파티나 비공식적인 행사 같은 자리들이 가끔 있다. 좋은 때깔의 옷을 챙겨가면, 활동을 오롯이 즐기고 기죽지 않을 수 있다.
2. 명사의 강의는 네임드에 따라 참여자의 수가 많이 다르다. 명바명(명사 바이 명사)다. 유명한 분의 강의나 공연은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최소 20분 전에는 가자.
3. 배가 흔들리는 지점은 육지 인근이 아니라 먼바다에 있을 때다. 멀미약은 요청하면 가져다주신다. 무게 중심이 있는 '중앙 아래쪽'이 덜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