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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멋진 신세계와 평화로운 감옥 사이

2025년 1월 20일(월)

by all or review Jan 25. 2025
오키나와의 아침은 주황빛이었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파란색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정치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오키나와의 아침은 주황빛이었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파란색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정치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


아침에 겨우 눈을 떴습니다. 목표는 6시 반 기상이었으나, 역시나 7시가 넘어서야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요. 크루즈 내 가장 싼 객실을 예약하다 보니, 방에 창문이 없습니다. 답답하지 않냐고요? 전혀요. 왜냐하면 방에 TV를 틀면 되니까요. TV 채널 3번은 선수에 달린 CCTV 영상입니다. 밤이면 어둡고, 아침이면 밝아지죠. '디지털 창문'이랄까요.

  

8시에 같은 조 분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7시 15분이 되어서야 뷔페식당에 아침 식사를 하러 갑니다. 오늘은 멜론이 아주 달고 맛있었습니다. 다른 음식은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아침에 8시에 모여서 9시까지 하선 준비를 합니다. 조원 분들과 각자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직업은 뭐고 등등을 얘기하다 보니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저는 연구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아 아세요? 정규직은.. 열심히 해야죠.."의 반복이랄까요.



강행군의 시작


9시에 하선하여 일본 오키나와 땅을 밟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더웠습니다. 구글맵스 상으로 한국보다 꽤 아래에 있는 걸 확인해서야 날씨를 이해했습니다. 반팔 입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10명이 렌트한 벤을 타고 일본 오키나와를 돌기 시작합니다. 


진짜 오키나와 바다는 '와' 밖에 안 나오는 휴양지임.진짜 오키나와 바다는 '와' 밖에 안 나오는 휴양지임.

오키나와에서는 조금만 움직이면 바다가 보입니다. '바다와 공존한다'는 말이 딱 맞겠습니다. 일본어 간판과 대화들 속에 약간의 설렘도 공존했습니다.     

만자도는 그림 같이 예뻤다. 데이식스 노래를 BGM으로 깔면 딱이다.만자도는 그림 같이 예뻤다. 데이식스 노래를 BGM으로 깔면 딱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만자도였습니다. 해안 절벽이 있는 곳입니다. 류쿠 시대 왕이 왔다간 곳으로, 1‘만’ 명이 앉아(좌) 있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로 ‘만자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름의 유래는 제게 전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작 100엔을 지불하고 약 10분간 트래킹을 하면 끝나는 짧은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만 명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그러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앉아야 할까?’ 정도를 생각하다가 걸음이 끝납니다. 느낀 점은 2개입니다. 물이 맑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쩌면 ‘만자도’가 아니라 ‘만안도’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름 때문에 조금 흐렸는데, 바다 색깔은 확실히 에메랄드였다. 물론 에메랄드를 실제로 가져본 적은 없다. 모래가 부드럽다.구름 때문에 조금 흐렸는데, 바다 색깔은 확실히 에메랄드였다. 물론 에메랄드를 실제로 가져본 적은 없다. 모래가 부드럽다.

차에 다시 올라타서 도착한 곳은 코우리 해변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계셔서 당황스러웠는데요. 


일단 침착하게 해변가로 걸어가 모래를 만졌습니다. 바다와 모래는 태초의 것이니까, 태초의 느낌을 느껴보고자 한 거였는데요.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을 때,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가자!” 


패키지여행의 단점은 오롯이 즐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죠.   

  

아직도 왜 찍었는지 모르겠는 사진 1아직도 왜 찍었는지 모르겠는 사진 1

잠시 뒤, 벌써 세 번째 장소에 도착합니다. 오키나와 수족관 옆에서 잠시 점심을 먹기 위해 소바 식당에 들렀습니다. 되지도 않는 일본어를 또다시 시작합니다. 


“마스터 카드, 오케이?” “노. 온니 캐시.” 


아, 또 시작됐습니다. 이 정도면 세계 각국에 마스터카드를 알린 대가로 ‘명예 마스터카드 홍보대사’를 받아야 할 지경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 현찰을 가져오셔서 식사 메뉴를 빠르게 정하실 무렵, 저와 친구 둘은 당장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직원이 다가와 손짓을 시작합니다.


 “awephfhsdf 로손 EHopfhpdof”


대충 설명을 들어보니 근처 로손 편의점에 가서 환전을 해오라는 뜻 같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거면 진짜 괜찮아. 20대가 돈이 어딨다고. 여기서 그냥 먹어. 이자도 싸게 해 줄게(웃음)” 


일행 분이 한 끼 정도는 빌려주겠다고 하시는 걸 뿌리치고 편의점으로 걸어갑니다. 손에 4만 엔을 들고 당당히 그 소바 식당으로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오케이 캐시 레츠 고!” 이번 여행 중 가장 자신감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그놈의 “마스터 카드, 오케이?”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킨 건 디럭스 소바였습니다. ‘이치방(최고의)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제 체격을 보고는 큼지막한 음식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좀 웃겼습니다.


생각해 보죠. 한 외국인 여행객이 우리 가게에 찾아와 음식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합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 ATM에 가서 바꿔오라고 했더니 정말 바꿔서 손에 40만 원을 들고 온 겁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현금 가시죠!" 


한 끼에 1~2만 원이면 되는데, 40만 원이나 바꿔왔다니, 웃기지 않을까요.


두툼하고 부드러운 삼겹살이 2줄이나 들어간 소바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르신 분들은 짜고 기름져서 못 먹겠다고 투덜대셨지만, 저와 제 친구는 연신 ‘오이시’를 외쳤습니다. “역시 구글 평점 4.3은 달라”라며 감탄했죠.

돌고래 조형물이 있었다. 왜 찍었는지 모르겠다.돌고래 조형물이 있었다. 왜 찍었는지 모르겠다.

다음 도착지는 ‘오키나와 아쿠아리움’입니다. 출발할 때부터 ‘15시에 있는 돌고래쇼를 보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을 만큼 대단한 기대들을 하고 계셨죠. 


'세계에 딱 3개의 수족관에만 있는 고래가 있다'는 말도 당연히 구미가 당기긴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조금 이상했습니다. 환경재단이 오키나와 수족관이 유명한 걸 알면서도 이걸 관광프로그램으로 넣지 않았다? 왜지?


생각보다 너무 높이 날아 올라서 좀 놀랐다. 태어나서 돌고래쇼를 본 게 처음이었는데, 바다가 바로 앞이라서 고향이 그립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난 확신의 F다.생각보다 너무 높이 날아 올라서 좀 놀랐다. 태어나서 돌고래쇼를 본 게 처음이었는데, 바다가 바로 앞이라서 고향이 그립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난 확신의 F다.

돌고래쇼를 보면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돌고래쇼는 90%의 신기함과 10%의 죄책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수신호에 따라 빙글빙글 돌고 2m씩 뛰어오르는 등 ‘사람의 말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알아들을까’하며 ‘정말 똑똑하다’싶다가도 ‘저걸 연습하려면 얼마나 노력했을까’라는 일말의 양심이 저를 쿡쿡 찔렀습니다. 같이 보던 친구도 마찬가지였죠. ‘와’하는 감탄 뒤에는 ‘흠’이라는 한숨이 남았습니다.    

  

뒤가 바다다. 그림 같다. 좋은 뜻은 아니다.뒤가 바다다. 그림 같다. 좋은 뜻은 아니다.

오키나와 돌고래쇼 공연장의 뒷배경은 바다입니다. 해안가로부터 약 20m 앞에 두고 세워진 돌고래들의 기분을 생각하면 영 찝찝합니다. 집을 앞에 둔 돌고래의 마음이 느껴진달까요. 그제야 ‘환경재단은 알면서도 수족관 프로그램을 짜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했습니다.


물론 이 확신은 다양한 생물들을 보면서도 이어졌습니다. 원형 수족관을 빙글빙글 도는 물고기와 해파리, 네모나게 각진 틀에서 꼼짝 않는 산호초 등등을 수없이 지나쳤죠. 수족관은 ‘멋진 신세계’이면서도 ‘평화로운 감옥’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원시시대에 얘 만났으면 바로 36계 줄행랑임. 생긴 것과 전혀 상관없이 크기 때문에 너무 무서움.원시시대에 얘 만났으면 바로 36계 줄행랑임. 생긴 것과 전혀 상관없이 크기 때문에 너무 무서움.


너무 부정적으로만 쓴 것 같아 긍정적인 얘기를 하나 추가하자면요. 실제로 생물의 건강 수명은 자연 상태일 때보다 이렇게 수족관이나 동물원에서 생활할 때 더 길어진다고 합니다. 아, 행복감이나 스트레스 수치와는 별개입니다. 좋은 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 같네요.


테무 LA랄까. 햇빛도 날씨도 LA 향이 났다. LA를 안 가본 게 함정이다.테무 LA랄까. 햇빛도 날씨도 LA 향이 났다. LA를 안 가본 게 함정이다.

수족관을 다 보고 나서도 일정은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은 아메리칸 빌리지입니다. 그야말로 LA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리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사갈 기념품들을 찾다가 포기했습니다. 너무 화려했고, 너무 비쌌고, (결정적으로) 쓸데없는 물건이 천지였습니다. 


‘세상에 그런 기념품이 어딨 냐’는 반문이 가능하겠습니다. 그래서 전 기념품을 잘 사지 않습니다. 차라리 심부름을 하는 거였으면 기쁘게 합니다만요. 

진짜 어딜 가나 바다가 있다. 크루즈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고, 여기서 또 바다를 봤다. 근데 좋았다.진짜 어딜 가나 바다가 있다. 크루즈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고, 여기서 또 바다를 봤다. 근데 좋았다.

로손에서 멜론빵과 푸딩을 하나 집어 들고 바다 앞에 앉아 거리음악을 들으며 잠시 멍을 때립니다. 어쩌면 그 10분이 밖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장 길게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화, 안정, 쉼 그 어떤 말을 다 합쳐도 완벽해지지 않을 분위기는 아직도 제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가오리는 이상한데 귀여움. 약간 최준 같음.이 가오리는 이상한데 귀여움. 약간 최준 같음.

배로 돌아온 시간은 18시 30분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어른들께서 다들 너무 힘들어하셔서 일단 크루즈로 곧장 돌아온 것이죠. 다들 배에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하셨고, 저와 제 친구는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웅을 해드리고 난 다음 다시 뚜벅뚜벅 길을 걷습니다. 이제 막 1만 2천 보를 넘었을 때였습니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 항구 근처에는 ‘국제거리’가 있습니다. 다양한 음식점과 가게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불빛이 많은 서울의 밤거리와 유사합니다. 일단 저녁으로 덮밥을 하나 먹고, 돈키호테에 들렸습니다. 간식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배에서 간식을 사 먹을 순 없으니 사서 들어가야죠. 편의점에 들러 ‘신라면’까지 사들고 갑니다. 근처 식당 옆에 서서 무료 와이파이도 빌려 씁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밀린 에피소드들을 다운로드합니다.   


이제 무적이 되었습니다. 손안에 ‘캐시’도 있겠다, 가방에 ‘간식’도 있겠다, 핸드폰엔 ‘킬링 타임 영상’들도 있겠다, 세상 두려울 게 없습니다.


크루즈로 돌아오는 길은 약 40분이었습니다. 2만 보를 찍었을 무렵까지 친구와 이른바 ‘진대(진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경제, 사회 등의 분야에 대해서요. 소위 말해 ‘빠꾸 없이’ 말하다 보니 내용을 모두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점이 꽤 있었습니다. 반대로 생각의 결이 같은 부분도 많았고요. 남자 둘이 술 없이 너무 이런 얘기를 깊이 한다는 게 이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행의 가이드분께 컵라면 2개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점심 식사를 잘하지 못하셨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서 소소하지만 마음을 담았습니다. 방에 잠시 들려 컵라면을 드리고 나올 때에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젓가락이 없었네?’ 


씻고 잠에 들 준비를 합니다. 오늘은 정말 일찍 자야 합니다. 친구는 걸프렌드와 연락을 하겠다고 갑판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솔로는 이렇게 쓸쓸히 글을 쓰다가 잠에 듭니다.


아무래도 멋진 신세계와 평화로운 감옥 그 어딘가에 있는 수족관과 이 크루즈는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23시 44분입니다. 여태껏 크루즈 여행 일정 중 가장 빨리 잠에 드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내일은 일찍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의 그린보트 꿀팁 3가지

1. 창문이 없는 방은 채널 3번을 켜서 '디지털 창문'으로 대체하자. CCTV로 일출, 일몰을 볼 수 있다.

2. 오키나와는 우리나라보다 많이 덥다. 최소 15도는 덥다. 반팔, 겉옷 하나 정도만 챙겨도 충분하다. 

3. 환경재단은 '오키나와 아쿠아리움'을 관광 코스에 넣지 않는다. 돌고래쇼 때문일 것 같다. 죄책감이 좀 드니까 오키나와 수족관은 여행지로 제외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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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권 이미지
Jan 25. 2025

크루즈여행은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여행인데 너무나 상세히 설명해 주시고 꿀팁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본 적이 없지만 가본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작가님의 너무나 섬세한 표현력과 자상한 설명들이 완벽을 이루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인생 버킷 리스트에 크루즈 여행을 꼭 넣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행복한 인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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