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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23. 2021

엄마는 100살까지 살겠다

엄마와 데이트를 하면 나는 일부러 엄마에게 말을 건다. 

자꾸 기억을 떠올려보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은 갈수록 기억을 못하는 반면 옛날 일은 놀랍도록 선명하게 기억하신다. 

치매환자인 엄마가 머나먼 시절의 인생사를 엊그제 일인 양 재잘거리듯 술술 풀어내시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이다.

나는 그런 엄마의  구불구불한 길의 여정을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도 옆자리에 앉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도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먼, 나 각시 때 고생을 지지리도 했재. 고생을 해야 명을 잇는다고 했거든.” 

엄마의 당연한 대답 속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우리 엄마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궁핍한 큰집 장손에게 시집와 매운 시집살이를 하며 퍽이나 팍팍한 삶을 사셨던 게 내가 보고 들은 기억에도 오련히 남아있다.

엄마는 그 시절이 새록새록 생각나는지 새삼 감회에 젖는 표정이다.

“시집을 요상한 데로 와가지고, 내가 각시 때 광양내기 청상과부 시어머니 밑에서 온갖 시집살이 하면서 비문이 고생을 많이 안했냐. 시어머니 시누 생각하면 몸써리 난다. 새벽에 일어나 소죽 써서 퍼주고 집안일을 거지반 해놓으면 시누가 쬐간 그릇에 밥 한 숟가락 딱 훑어서 담아주면 그걸 후딱 먹고, 간에 기별도 안 가재. 그걸 먹고 또 오후에는 밭에 나가 들깨도 털고 잡초도 매고 새가 빠지게 일을 했지. 해도 왜 그리 긴지...”

엄마의 다소 상기된 표정에서 허기지고 고달팠던 삶의 애틋한 그림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의 뒷말이 궁금했다.

“그런데 고생을 해야 명을 잇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예요?”

“내가 각시 때 동네에 점쟁이가 왔는데 남들이 점을 보기에 나도 돈을 내고 점을 한번 봤거든. 그 점쟁이 말이, 명이 단명인디 고생을 무지 해야 명을 잇것소 라고 하더라.”

나는 ‘아!’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해가 한발이나 남았을 때 울 엄마가 나를 낳았단다. 그러면 단명하단다.”

“한발이나 남았을 때가 해가 조금 남아있을 때라는 말인가요?”

“잉, 해 넘어갈 때, 해가 쬐금 남아있을 때라는 말이지.”

“아, 그렇구나!”

중천에 뜬 긴 해가 아니라 저물녘에 세상에 나왔으니 명이 길지 않는다는 풀이였나 보다. 

“울 엄마가 해거름에 나를 낳고 난 뒤 첫국밥을 밤에 먹어서 명이 단명한다고 그러더라. 그러면서 고생을 해야 명을 잇는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고생을 지지리 해서 명을 이었지.”

“제 어릴 적에 보면 엄마가 남의 집 일도 다니고 행상하러 다니고 했던 게 기억이 나네.”

“긍께, 촌구석에서 시내로 이사 나와서는 파출부일도 다니고, 김도 갖고 다니면서 팔고, 오뎅공장에도 다니고 그랬지. 돈 벌러 안 해본 일 없이 많이 했지.”    

엄마의 질긴 동아줄처럼 이어진 고생스런 삶은 그 점쟁이 말대로 가느다란 명을 잇기 위한 불가피한 운명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한편으로는 궁박한 처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위로해주려 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점쟁이는 엄마에게 팍팍한 삶의 현실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게다.

엄마가 중얼거리듯 한탄스럽게 토로하는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거 같았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기나긴 운명의 질곡에서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으시듯 말하셨다.

“내가 베를 날고 매고 짜고, 베도 하루에 한필씩 짜고, 남의 집 베도 많이 짜러 다니고 그랬다. 베를 하도 잘 짠께 동네 아저씨들이 근동에서 제일이다 라고 그랬거든. 일은 뒤로 안 빠지고 고생을 참고 살았어. 그래서 내가 명을 이어서 오래 살았지. 느그 아부지는 폴세 갔는데.”

엄마의 ‘폴세’라는 말이 유독 귓전을 울렸다.

“그래요, 울 엄마는 고생을 많이 해서 100살까지도 족히 살겠네.”라며 위로 같지 않는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엄마는 내 호의를 받아주며 헤헤 웃으셨다.


어쩌면 그 고생이 고마운 일이다. 엄마는 불감청고소원 마냥 고생을 사서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괴롭고 힘에 부친 시간도 이렇게 훗날 생각해보면 내 삶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 줄기 물줄기가 바위에 부서지고 굽이쳐 흘러 비로소 평온하고 유유히 흐르듯이 말이다.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잠깐 상념에 잠겨있는데 엄마는 그간 고생한 것이 떠올라 고단하셨는지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엄마의 소록소록 코코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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