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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23. 2021

엄마는 배운 여자였다

벚꽃이 절정에 이른 즈음에 강변을 따라 엄마와 드라이브를 했다.

엄마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시더니, 

“아따! 사쿠라 꽃이 많이 피었네!”라고 감탄하며 갑자기 엔카풍의 노래를 흥얼거리시기 시작했다.

“엄마 그게 무슨 노래여요? 일본노래인 거 같은데.”

“응, 나 왜정시대에 학교 다녔어. 해방시대에도 학교 다니고, 그래서 일본노래도 해. 우리 아부지가 학교 보내줬어. 나를 공부를 제일 많이 갈쳤지, 우리 아부지가." 

“아하!”

"언니들이고 동생은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는데 셋째 딸만 학교를 보내줬당께.“    

엄마는 ‘사쿠라’ 꽃을 보시더니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에 학교 다녔던 일이 기억에 새로웠나보다.

그리고 배움을 자랑하고 싶으셨는지 자꾸 일본 노래를 부르며 “우리 아부지가 나만 갈쳐당께.” 라고 되뇌며 으쓱해하신다. 그때는 식민통치가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라 일본인 선생이 일본어로 수업을 하고 일본노래를 부르게 했을 것이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엄마가 빛바랜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입버릇처럼 자주 하셨던 말을 떠올린다.

엄마는 2남 3녀 중 셋째 딸인데, 그 당시 외할아버지가 다른 자식은 학교에 안 보냈지만 셋째 딸만큼은 총명하고 이뻐해서 없는 살림에도 국민학교를 보내줬다고 흐뭇해하시곤 했다. 그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궁박한 상황이라 태반이 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 배움 덕분인지 엄마는 그 이후 한글도 깨우치셨고 맞춤법도 제법 정확하다. 그래서 나에게 가끔 용돈을 주실 때도 겉면에 ‘사랑한다 우리 아들, 늘 조심하고 건강해라’라는 글자를 또박또박 정성스레 쓴 봉투에 넣어주시곤 하였다.      

   


문득 옛날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학교에서 별의별 실태파악을 다 했던 거 같다. 가정환경조사라는 것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위화감을 조성하고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사일수도 있는데, 학기 초에 피아노, 티브이 등 가전제품의 소유 여부부터 학부모 학벌까지 조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이 신상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는 종이를 나눠주었는데 거기에 부모의 최종학력을 기재하는 란이 있었다. 난 그때 정확히는 잘 몰랐지만 어렴풋이 두 분 다 국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국졸’이라고 쓰기가 못내 창피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그 란만 비워두고 잠시 궁싯거리다가 옆에 앉은 친구 것을 힐끔 쳐다봤는데, 그 애 부모님은 고졸과 중졸이었다. 그걸 보니 더욱 국졸이라고 쓰기가 창피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며 아버지 학력을 ‘중졸’, 엄마 학력도 ‘중졸’이라고 써버렸다. 허위 학력을 기재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엄마의 노래를 들으며 씁쓰레한 미소를 짓는다. 엄마는 일본어도 할 줄 아는 배운 여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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