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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을재수 Sep 13. 2023

너와 나의 관계는 무엇으로 남으리

(3-1부) N의 스치는 시선은 찰나의 순간으로 영겁(永劫)에 남겠지




미국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예를 들면 이런 날들이,



자다가 눈곱도 안 떼고 일행들에게 이끌려 시장에 가게 되었는데 아마존에서 구매했는데도 셀카봉을 미국인도 모르던 그런 한때, 츄리닝에 슬리퍼 신고 빙구처럼 웃으면서 셀카봉을 들고 빙빙 돌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아이가 다다다 뛰어와서 아이도 나도 다칠뻔했던 찰나, 공기와 온도에 스며든 아침 햇살 그리고 그 모든 눈빛이 따스했던,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빙구 같은 날 흥미롭게 보고 있었기에 당혹과 안도가 뒤섞여 모든 게 따뜻했던 그런 날이라든지 


동네 한량처럼 아침밥 먹고 땡, 점심밥 먹고 땡 하듯 커피 먹으로 이동하던 어느 날, 꿈에서 봤던 거대함이 하늘 같고 아늑함은 땅 같았던 그 나무와 작지만, 똑같이 닮은 나무를 마주하고 '어떻게 여기에 있지'하며 나무에 손을 데는 순간 그냥 알아버려서, 그저 앎으로 전해와서 오열하니 뒤에 서 있던 M과 N이 어리둥절하며 다가와 괜찮냐고 내 어깨를 잡는 순간 같이 오열하던 그런 날이라든지 


버킷리스트에 있던 스케이드보드를 배우겠다며 보드를 사러 온 동네를 휘젓고 쏘다니다 여행 클래스 대장인 H한테 다쳐서 병원에 가면 병원비 많이 나온다고, 여긴 한국이 아니라며 생각이 있네 없네 나이는 어디로 먹었네 하며 아주 혼구멍이 놨던 날이라든지 


어마무시한 규모의 의류 창고를 갖고 있는 사업가의 창고에서 이 옷, 저 옷 입어보며 난생처음 입어보는 옷들마저 걸치다 못해 음악과 조명, 사진까지 더해져 패션쇼를 방불케 하던 그런 날이라든지 


바닷가에 가든 할리우드 가든 달 보러, 별 보러 가든 차만 타면 컬투쇼 하이라이트를 무한 반복하며 들어서 외우다시피 한 에피소드를 매번 새로 듣는 것처럼 미친 듯이 박장대소하는 그런 날이라든지 


여행 클래스 사람들 단체로 요가를 하거나 단체로 수영을 하거나 단체로 영화를 보거나 단체로 미술관에 가거나 단체로 명상을 하거나 단체로 관광지에 가거나 단체로 야구 관람을 하거나 단체로 몰카를 찍던 날이라든지 


모두가 잠든 새벽, 달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던 그런 시간에 한 명 두 명 벌떡 일어나 앉아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고 세븐일레븐으로 달려가 슬러시를 하나씩 들고 오던 그런 날이라든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동네에서 얼굴을 익힌 이웃이 생겨나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말을 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나누던 그런 날이라든지 


동네 불량배랑 가까워져서 마지막 날에는 서로 아쉬워하며, 있는 거 없는 거 모두 모아서 불량식품과 한국 음식들, 각종 물건을 나눠주던 그런 날이라든지 


이웃 꼬마랑 친구하고 꼬마가 탐내던 백조 튜브를 물려주며 갖가지 인형과 장난감도 선물해 주던 그런 날


동네 한량과 친해져서는 가볼 곳, 안 가볼 곳, 못 볼 꼴, 좋은 꼴 다 보면서 좋다고 깔깔깔 웃던 그런 날들



이런 날들이 이 지구에 태어나, 일생일대 가장 한가로운 평화였다.






그런 평화들 사이 N과 약속했던 외출을 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쭉 직진만 하면 되기도 했고 가는 길에 있는 상점과 공원을 N에 알려주기 위해 산책 겸 걸어서 가기로 했다. 생색을 하늘만큼 땅만큼 내면서. 어느새 동반 외출을 왜 하는지 새까맣게 잊고서. 



"알아봤는데 저쪽 공원에 가면 스케이트보드 타는 곳이 있데."  N에 말했더니 

앞서가던 N이 왕밤눈을 해서는 휙- 뒤돌아 와 내 팔을 잡고 흔들면서 


"H한테 안 한다고 했잖아. J야 넌 뼈 부러지면 뼈도 잘 안 붙게 생겼다고." 


N의 팔을 뿌리치고 N의 왕밤눈을 따라 하며 쿵쾅쿵쾅 걸어 앞서니 N이 가볍게 성큼성큼 걸어가 더 앞서고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은행 갔다가 알라딘 가자. 부지런히 따라 와." 


아, 웃겨라. 189cm가 한 걸음 하면 159.8.cm은 세 걸음으로 다다다 해야 맞출 수 있는 걸음이지만 안 힘든 척 잘 걷고 있었는데 N, 도전하는 건가. 그렇게 한 걸음과 세 걸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은행에 들렀다 알라딘에 도착했고 N이 책을 다 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N이 이상하다. 



서점의 모든 책을 하나하나 살피듯이 만지작 만지막거리며 갈 생각을 안 한다. 


이미 다리는 아픈데 이 미국은 어떻게 생겨먹은 게 앉을 의자 하나 없는 데다 땡볕이라 에어컨 없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N의 뒤꽁무니만 쫓아 'N, 다 봤어.' 'N 찾는 책이 있어' 'N 아직이야' 하는데도 책에 집중하는 N은 한 번씩 쓱 쳐다볼 뿐 대답이 없다. 


책 사이 구석에서 N을 노려보다 안 되겠다 싶어 가까이 다가가 'N, 나 다리 아파'하려는 순간 N이 휙 뒤돌아보더니 허리까지 굳이, 구태여 굽혀가며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책이 젖어서 그 책 다시 사려고 했는데, 없네. 다른 책 몇 권 더 사려고"


"아, 그렇구나.. 마음껏 골라봐..!" 하며 뒤로 물러나 쭈글쭈글 구석에 앉았다. 


다리가 너무 아파 힘이 없었고 피곤하니 졸렸다.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쭈그려 앉아 책 보는 척 책 매대에 머리를 기대니 졸도할 것 같다. 그로부터 한참, 아주 한참을 있으니  N이 다가와 팔을 나에게 뻗으며 말했다. 


"J야 가자. 일어나." 


N을 올려다보는데 웃고 있는 N의 표정에서 악마를 본 듯하고 부러 그러는 것 같아 뱁새눈이 되었다. 해서 당장 버스 타고 집으로 가자고 말하려는데 N은 영화관으로 향했고 세 걸음으로 부지런히 따라갔는데도 행동이 얼마나 빠른지 표를 끊고 있었다. 


한국어로 영화도 볼 수 있다고 좋다며 신난 N에 그러면 혼자 보고 오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옆에 앉았는데 이미 본 설국열차다.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들었고 자면서 해드빙을 하며 여러 번 N을 귀찮게 했던 거 같아서인지 영화가 끝날 때 피곤함도 기분도 살짝 풀려 있어서 어느새 뱁새눈도 풀렸다. 





"N아 커피 먹자, 저기로 가면 커피빈 있어." 


"난 버블... 아, 가자." N이 버블까지만 말하고 호응했기에 어색한 사이좋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커피빈에서 주문하고 뒤돌아보니 N은 없고 이상한 외국인 남자가 서 있었다. 


"하늘은 널 사랑하셔." 하며 냅킨을 한 장 주고 매장 문을 열고 사라졌다. 냅킨을 들고 서 있으니, N이 어느새 나타나 뭐 하냐 물었다.


"어떤 남자가 냅킨을 주고 갔는데 '도를 믿으십니까'가 미국에도 있나 봐. 하늘이 날 사랑한대." 하며 우두커니 서 있으니, N이 팔 한쪽을 잡고 끌고 가 의자에 앉히곤 N은 커피빈 옆집 가게에서 가져온 관광 팸플릿을 보여주며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런 게 있네. 다음번에 애들하고 같이 가자." 건네준 팸플릿 속에 오늘 본 설국열차도 있길래 보면서 N에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N아 이거 봐봐." 


"세상은 말이야, 설국열차의 열차 칸처럼 열차 칸마다 들어갈 사람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누가 들어가게 될지 모르는 게임 같은 거 아닐까?"  N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이어서 또 말했다. 


"열차 칸의 등급을 무엇으로 나눴을까. 표면상으로는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숨은 뜻은 영적 성장을 말하고 있는 거 아닐까, 결국에 아이와 소녀가 살아남았으니까." N의 대답을 딱히 듣고자 한 건 아니기에 또 이어서 말했다. 


"근데 난 굳이 영적 성장으로 살아남는 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어딘지도 모를 추운 눈밭으로 떨어지느니 열차와 함께 나락으로 가겠단 거지." 의식 흐름대로 나오는 말을 멈출 줄 몰라 계속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회유하신들 원래 계략대로, 유턴 없이 직진이야. 그 몫도, 감당도 내 것이겠지만, 원하는 곳이 아니라면 의미 없단 말이지." 말인지 읊조린 것인지, 혹은 다짐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미국 여행에서 결국 확인할 필요 없는 것만 잔뜩 확인한 셈이지, 가엽게도" N이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아 또 말하려니 N이 말했다. 


"그 게임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건데."


"누가, 무엇이라기보다 인과에 따른 귀결(歸結) 아닐까. 그 선택의 귀결이 파멸이어도 어쩔 수 없는 인생 하나쯤 있는 거겠지. 그게 자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지옥은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거 " 정리가 되지 않아 자신 없게 말하고는 냅킨 한 번 보고 바날라라떼 한 모금 먹으면서 말하는 나를 빤히 보더니 



N이 말했다. 











※ 다음 편 3-2부에서 이어집니다. 




예수(재수?)님은 그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일단 독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는 '일단 산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의 2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니 혹시라도 산책 시리즈, 1편을 읽지 못하셨다면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iteuljaesu

그리고 

라이킷 & 댓글 남겨주시면 기운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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