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 기자의 통찰
요한복음서는 철학적이다. 시작부터가 그렇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는데, 그 로고스가 하나님 되심이라고 하였다. 한/영 번역에는 둘 다 단순하게 the Word was God(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여하튼 원문은 그렇게 단순한 정의로 쓰여지지 않았다.
여하튼 오늘은 1장 1절 보다 1장 중간쯤 나오는 부분을 택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개역한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공동번역)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현대인의 성경)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로고스가 예수라는 사람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로고스가 무엇인가? 로고스가 가진 여러 뜻 중 우리가 중히 여기는 것은 1)궁극적인 원리 2)말씀 이 두 가지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원리이든 말씀이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 밖의 것이다. 우주를 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인간이 알 수 없으며, 또한 두 번째 뜻인 말씀도 여기선 인간의 말이 아니라 말하자면 신의 말이다. [한편 로고스는 이성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이성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술적 이성(technical reason, 틸리히의 용어)과 구별된다]
헬라어 원문에서 말씀은 Logos로 쓰였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헬라니즘 철학의 용어를 차용하였다. 그는 철학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핵심적 용어를 가지고 왔다. 로고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우리 세상에 왔다고 하였다.
로고스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었던 헬레니즘 철학은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들의 시초가 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가 그랬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우리가 사는 감각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고, 이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밖에 되지 않는다. 저 세계 곧 이데만이 참된 세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물질세계에 꽤 비중을 두었으나, 그러나 그에게도 여전히 제일철학은 형이상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서 물질[질료인]은 본질[형상인]을 입어야 완전한 실체(substance)가 된다. 물질이 중요하나 본질이 당연 그 위에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기자는 로고스가 사람이 되어서 이 땅 가운데 왔다고 했다. 본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세계로 들어왔다고 썼다고 표현해도 오버는 아닐 것이다. 신적인 것이 인간의 형체가 되어 이 세상에 왔다. 육 비슷한 것을 입은 게 아니라(그노시스의 그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 땅에 사셨다.
바로 이 지점이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다.
신적인 로고스가 이 땅 가운데 오셨다..!
어디 오셨느냐 하면, 신선들이 사는 산 위가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사는 동네 한 복판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면하여 말씀하시고 고치시고 가르치셨다.
유대교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구름 타고 오실 이가 우리 인간과 완전히 똑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구름 타고 오신다는 것 자체가 초자연적 현상을 동반하고 오는 것이니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정말 인간이셨다.
그런데 그냥 인간이 아니고, 로고스이셨다.
요한기자는 어떻게 예수가 로고스인걸 알았을까.
아니, 무엇이 요한기자를 예수로 하여금 로고스가 인간으로 나타났다고 쓰게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예수의 삶에서 로고스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예수를 통해 로고스를 볼 수 있을까?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를 통해 로고스를 본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모함했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럼에도 로고스가 육신 되어 왔다는 이 기록은, 정경이 되고,
이 정경은 널리 퍼져나가서, 많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만들어냈다.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대교의 신 이해와 완전히 구별된다.
우리가 이것을 가벼이 취급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중한 문제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은,
바로 이 로고스가 육신 되었다는 지점부터 달라진다고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이 육신 되었다'라는 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이 예수가 되셨다라고 이해하는 것을 아주 반대한다.
'말씀이' --------- '육신되셨다' 이 두 구 사이에 거리와 간격이 있다.
이 사이는,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치열한 고뇌와 씨름과 해석과 믿음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